번호표 붙은 파란 조끼를 입고 마운드에 선 투수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눈빛은 날카로웠고, 몸짓 하나하나에선 간절함이 뚝뚝 묻어 나왔다. 공 하나라도 실수할 때면 자책하는 한숨 소리가 마운드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지막 꿈을 건 ‘야구 미생(未生)’들의 시험무대는 그만큼 절박했다.
17일 오전 경기 광주시 곤지암에 위치한 팀업 야구장엔 모처럼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이번 시즌부터 호주프로야구리그(ABL) 7번째 구단으로 합류하는 ‘질롱 코리아’ 창단 멤버에 도전하기 위해 모인 지원자들이다. 트라이아웃(공개 선발)에 지원한 170명의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며 차례대로 테스트를 받았다. 구장 밖에선 그들의 부모와 아이를 업은 아내까지 나와 초조하게 지켜봤다.
질롱 코리아 초대 감독을 맡은 한화 레전드 투수 출신 구대성과 삼성의 우완 사이드암 출신 박충식 단장이 선수들의 실력을 꼼꼼히 확인했다. 두산 4번타자 출신의 ‘두목곰’ 김동주도 타격 평가자로 합류해 눈길을 끌었다.
지원자 대부분이 야구 인생 끝자락에서 던지는 도전이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프로구단에 지명 받지 못했거나, 프로 구단에서 방출된 선수, 그리고 독립 야구단 소속 선수까지 야구 인생에서 수 차례 좌절을 맛봤던 이들이다. 38세 가장부터 19세 고교졸업 예정자까지 각자의 사연도 구구절절 했다.
2014~16년 3년 연속 퓨처스리그(2군)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며 ‘2군 매덕스’라는 별명까지 붙은 장진용(32)은 누구보다 절박한 심정으로 도전장을 냈다. LG에 2004년 1차 지명으로 입단했지만, 1군 무대에서는 프로 통산 3승 7패에 7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고전하다 지난해 방출됐다. 하지만 “야구 하나만 바라봤고, 야구 밖에 몰랐던 인생”이었기에 야구의 끈을 놓지 못했다. 투수 지원자 가운데 최고령인 장진용은 “LG에 있던 14년 동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호주에서 재기의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1년 두산에 1차 지명을 받고도 잦은 부상에 시달리다 2017년 방출된 최현진(27)도 모습을 드러냈다. 충암고 시절 노히트노런까지 세웠던 유망주였지만, 프로 적응이 만만치 않았다. 어렵사리 출전한 1군 경기는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고질병인 팔꿈치 통증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최현진은 “어렸을 때는 타고난 실력만 믿고 안일했다”면서 “이제는 절박한 마음으로 마운드에 오른다”고 말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도전을 망설였다는 그는 “그러나 도전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한화 전력 분석원 출신 서지호(22)도 눈에 띄었다. 천안 북일고 재학 시절 손가락 부상에 안 좋은 집안일까지 겹치면서 조금 방황을 했고, 프로구단 지명에 실패했다. 지난해 한화 배팅볼 투수 겸 전력 분석원으로 일했지만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독립리그로 자리를 옮겨 다시 야구공을 잡았다. 그는 “고등학교 때 잘못된 선택을 해 지난 4년간 벌을 받은 것”이라며 “그때는 어리광이 통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지막 기회를 꼭 잡고 싶다”고 말했다.
이밖에 2012년 고교 최대 유망주 출신으로, 넥센에 지명됐다가 ‘SNS 파문’등으로 1년 만에 방출된 뒤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해 화제를 모았던 길나온(25), 충암고 졸업 예정인 일본 국적의 포크볼 투수 시히로(19), 여자야구 국가대표 김라경의 친오빠인 한화 출신 방출 투수 김병근(25), 넥센 출신 방출 투수 구자형(28)도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충식 단장은 “호주 리그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도전해야 한다”면서 “실력도 중요하지만 완전히 야구에 빠져있고, 간절함이 있는 선수를 우선 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보다 지원자가 많아 트라이아웃 기간이 17일 하루에서 19일까지 3일로 늘어났다. 이날 오전에 열린 야수 부문(지원자 75명)에선 타격, 수비, 주루 등 테스트가, 오후 투수 부문(95명)에선 제구와 구속 평가가 이뤄졌다. 이날 50~60명이 추려져 18, 19일 자체 청백전 평가를 갖는다.
이들 중 25명이 합격 통지서를 받아 호주에서 새로운 야구 인생을 펼치게 된다. 호주 ABL리그는 11월 15일 시드니 개막전을 시작으로 내년 1월 15일까지 진행되고, 2월에는 포스트 시즌이 예정돼 있다. 호주 빅토리아주 질롱을 연고로 한 질롱 코리아팀을 비롯해 호주팀 6개 팀과 뉴질랜드 1개팀까지 모두 8개팀이 참가, 팀 당 1주일에 4경기씩 모두 40경기를 치른다. 질롱 코리아는 첫 시즌인 만큼 5할 승률이 목표다. 초반 분위기가 좋다면 포스트시즌 진출까지도 꿈꾼다.
강주형 기자 cubi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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