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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수(數)로 이루어진 세상

입력
2018.09.16 09:3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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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술 또는 사회생활 생존전략서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설득하는 법을 다룬 책이다. “사실이 아니어도 자신에게 유리한 아무 숫자라도 이야기 하세요. 사람들은 확인해보지 않아요. 대신 당신에게 설득 당할 겁니다.” 기억나는 한 구절이다. 수가 가지는 정교한 힘에 기대는 것이다.

수치정보는 외견상 매우 객관적이고 명확하다. 그래서 사회현상을 설명하기도 하고, 법적 기준으로도 사용된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수에 의해 표현되고, 수에 의해 규율되고 있다. 그러나 수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수동적이다. 수는 생각보다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따라서 개별상황에서 수가 가지는 의미를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수는 현실이다. 현실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이 통계이다. 그래서 통계는 정확해야 한다. 최근 정부가 경기와 고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통계 왜곡을 했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통계는 의도를 가지는 순간 취약해진다. 가장 간단하게는 모집단의 구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빅데이터 시대에 의도적 왜곡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그래도 ‘오비이락’이라 통계의 독립성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은행에서 편제하는 통계의 신뢰성이 높은 것은 중앙은행이 갖는 독립성이 통계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적 통계라도 해석상 얼마든지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따라서 해석의 차이는 상호검증을 통해 그 의미를 판별해야 한다.

수는 허상이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공약이다. 선거의 승리를 위해 정제되지 않은 이론적 숫자들을 남발한다. 장밋빛 미래가 수를 통해 그려진다. 작은 단체일수록 공약은 미리 검증되지도, 깊이 논의되지도 않는다. 유권자들 중 일부는 진짜 믿은 사람이 반, 믿지는 않지만 모르는 척 청구서를 들이 밀 준비를 하는 사람이 반이다. 국가차원의 선거에서는 매니페스토 운동이라는 검증수단도 있지만 사실 미래의 전망과 계획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약의 진실성 여부를 걸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인 선거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낭비요소가 되기도 하고, 역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래서 선거에서 승리하더라도 다시 객관적으로 공약을 걸러보는 공약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수는 기준이다. 법으로 정해진 기준은 국민과 국가 스스로를 구속한다. 그런데 법에는 그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이 없다. 법안검토서류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 현장에서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조차도 기준이 되는 수치가 그렇게 정해진 이유를 모른다. BIS 자기자본비율은 왜 8%일까. 교통신호위반 범칙금은 왜 6만원일까. 놀라운 것은 누구도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형기준도 마찬가지이며, 소년범의 처벌기준인 연령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와 달리 수많은 정보를 통해 인지능력이 발달된 촉법소년들의 연령을 14세로 제한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은 규범화된 수에 대한 궁금증이 시작된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정해놓은 수는 국가 스스로를 통제하기도 한다. 독일 재정건전성의 핵심은 독일기본법 제115조에 국가채무한도를 GDP의 0.35%로 묶어두고 정부와 의회 자신을 구속한 ‘채무브레이크’에 있다.

모든 수에는 의미가 있다. 때때로 우리는 작은 수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거스름돈 정도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법적 의미를 갖는 수라면 그 작은 차이가 위법과 적법을 가르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마치 99도에서는 물이 끓지 않지만 1도만 오르면 물이 끓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수로 이루어진 세상, 수는 시민적 권리의 기초이자 사회변화의 출발점이다. 수로 인해 머리가 아파도, 우리가 수에 대한 맹목적 신뢰와 수동적 인식을 걷어내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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