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2011년 9월 17일, 세계 금융시장의 심장부인 뉴욕 로어맨해튼 월가 인근은 시끄러웠다. ‘월가 점령’을 표방한 시위대의 당초 목표는 월가를 상징하는 ‘성난 황소’가 있는 볼링 그린 공원이었지만, 경찰이 미리 시위 장소를 막으면서 인근에 있는 주코티 공원이 집회 장소가 됐다. 시위대는 그대로 공원을 점거했다. 매스컴이 몰려들자 각지에서 물자 후원이 이어졌다. 공원 한쪽에는 ‘시민 도서관’과 와이파이망이 설치됐다. 캐나다에 기반을 둔 국제 행동주의 단체 ‘애드버스터즈’가 그해 7월부터 제안한 월가 점령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시위대는 혼란스럽고 주체가 없었고 핵심 주장도 없었다. 시위가 끝나는 날도 약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운 “우리가 99%다”라는 구호의 파급력은 컸다. 금융위기 이후 소득 양극화가 심화했고 실업이 급증해 99%는 고통에 빠졌는데, 정작 탐욕으로 금융위기를 불렀다는 상위 1%가 집중된 월가에서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해 10월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그 이전 20년간 오로지 상위 1%만이 극적인 수입 상승을 경험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해 시위대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사실 월가 점령 시위는 2011년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시작으로 중동의 민주화를 요구한 아랍의 봄, 영국과 그리스의 반(反)긴축시위, 스페인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자들)’ 시위 등의 영향을 받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동원, 지도부의 부재, 사회 전반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 등이 유사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 미국 월가에서 일어난 점거 시위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컸다. 그해 10월 15일에는 전 세계 82개국에서 동시에 점거 시위의 취지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다.
월가 점령 시위 자체는 2개월을 채 가지 못했다. 11월 15일, 마이클 블룸버그 당시 뉴욕시장은 점거지인 주코티 공원의 위생과 안전 문제를 구실로 시위대를 몰아냈다. 점거를 재개하려는 산발적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월가 점령을 회고하는 전문가들은 당초 집회의 장점으로 꼽혔던 지휘 체계와 조직 부재를 실패 원인으로 꼽는다. 이 때문에 99%의 요구는 기성 정치권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다. 나중에는 더 싸늘한 혹평이 이어졌다. 시위 참가자로 2개월 감옥살이를 한 세실리 맥밀런은 “99%인 척하지만 결국 상위 5%만의 시위였을 뿐”이라고 자기 반성했다.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는 “저항이 아니라 저항적 자세를 소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점거가 흐지부지된 가운데, 금융 세계화에 반발한 민중이 선택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를 앞세운 대안우파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점거의 유산이 아예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미국 정치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수입 불평등은 2016년 미국 대선의 중심 의제로 떠올랐고, 좌파 정치인의 불모지였던 미국에 버니 샌더스라는 신성을 탄생시켰다. 2018년 들어서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구주류가 무기력해진 가운데 민주사회주의 진영 정치인들이 대안으로 떠오르며 미디어의 주목을 한껏 받고 있다. 이들이 미국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자라난다면, 많은 미국인은 2011년 9월을 그 시작점으로 떠올릴 것이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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