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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랑 산다] 나이 든 토끼와 사는 것

입력
2018.09.16 11:00
수정
2018.09.1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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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잠만 자다가 반려인이 돌아오면 문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넨다. 이순지 기자
낮에는 잠만 자다가 반려인이 돌아오면 문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넨다. 이순지 기자

많은 반려인들이 처음 토끼를 집에 들였을 때 토끼가 늙을 것이라는 상상은 쉽게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크기가 한 주먹이 채 안 되는 아기 토끼를 데려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2013년 가족이 된 토끼 랄라는 시도 때도 없이 뛰어다니기를 좋아했다. 힘이 넘쳐서 자신의 키보다 10배 높은 토끼집 위를 올라가다 골반뼈에 금이 간 적도 있다. 수의사는 “랄라는 아직 젊어서 괜찮다”고 진단했고 실제로 랄라의 골반뼈는 2주가 안돼 말끔히 붙었다.

언제까지나 밝고 명랑할 줄 알았던 랄라는 이제 ‘나이 든 토끼’가 됐다. 토끼 평균 수명은 8~14년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토끼 반려 문화가 발전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5살만 넘어도 ‘노령 토끼’로 인식한다.

나이 든 토끼에게 나타나는 동물성 치매에 대한 수의학적인 정의는 아직 내려지지 않았지만, 통상적으로 기억을 잊는 등 특정 행동을 보이는 토끼들에게 ‘치매 증상을 보인다’고 진단한다. 랄라도 귀여운 외모는 여전하지만 어릴 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오줌을 아무 데서나 쌀 때가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사과를 줘도 이가 아픈지 살짝 맛만 보고 먹지 않는다. 과거와 다른 낯선 모습들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던 반려동물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귀찮아진 5살 랄라

좋아하던 사과를 입에도 대지 않고 사료통은 엎어버렸다. 이순지 기자
좋아하던 사과를 입에도 대지 않고 사료통은 엎어버렸다. 이순지 기자

미국 국제 비영리 동물복지기관 ‘집토끼협회’(House rabbit society)는 토끼의 노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털과 피부가 거칠어지고 손톱 바깥쪽이 두꺼워진다. 토끼 시력과 청력에도 변화가 생긴다. 또 온도에 민감해진다. 체중이 갑자기 감소하거나 늘어난다. 위생 관리에도 어려움이 생긴다. 치아 질환이나 방광, 신장에 문제가 생기는 일도 급증한다.”

나이 든 토끼는 노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피부가 거칠어진다는 점도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도 비슷하다. 어린 시절 랄라는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였다. 집에 있던 전선은 랄라의 커다란 앞니에 모두 너덜너덜 해졌다. 이유도 없이 온몸 뒤틀기를 하며 거실 끝에서 끝까지 마치 치타처럼 뛰어다녔다. 하지만 요즘 랄라는 그렇지 않다. 낮이면 침대 위에 올라가 발을 쭉 뻗고 잠을 청하기 바쁘다. 아무리 맛있는 간식을 갖다줘도 시큰둥하다. 내가 알던 어린 시절의 랄라는 이제 없다. 대신 모든 일에 관심이 없고 차분한 랄라가 남아있을 뿐이다.

미국 반려동물 커뮤니티 사이트 ‘팻플레이스’(Petplace)는 “나이 든 토끼는 나이 든 대로 성숙하다”고 표현했다. 힘 넘치던 랄라는 없지만 나이 든 랄라는 ‘척하면 척하고’ 모든 것을 알아듣는 나의 친구가 됐다. 토끼는 야행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랄라는 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인 오후 11시가 되면 침대로 달려와 내 곁에서 잠을 잔다. 기상 시간인 오전 7시면 밥을 달라고 잠을 깨우기도 한다. 삶의 패턴이 내 일상에 맞춰져 있다. 노령 토끼가 된 랄라는 모험을 즐기는 대신 익숙함을 사랑하는 토끼가 된 것 같다.

◆혹시 내 토끼가 치매일까?

노령 토끼에 대한 내용이 담긴 일본 도서 '늙은 토끼의 집'. 네이버 블로그 '엠버의 일상 그리고 토끼 이야기'(http://blog.naver.com/judith11) 운영자 제공
노령 토끼에 대한 내용이 담긴 일본 도서 '늙은 토끼의 집'. 네이버 블로그 '엠버의 일상 그리고 토끼 이야기'(http://blog.naver.com/judith11) 운영자 제공

토끼 반려 문화가 발전한 일본에는 노령 토끼에 대한 책도 많다. 그 중에서 올해 6월 발간된 ‘나이 든 토끼의 집’(うちのうさぎの老いじたく)이 최근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국내에서는 토끼 ‘로빈’을 키우는 네티즌 ‘엠버’가 운영하는 네이버 블로그 ‘엠버의 일상 그리고 토끼 이야기’를 통해 번역된 내용 일부를 볼 수 있다.

토끼 랄라가 화장실을 옆에 두고도 방석에 잔뜩 오줌을 싸놨다. 이순지 기자
토끼 랄라가 화장실을 옆에 두고도 방석에 잔뜩 오줌을 싸놨다. 이순지 기자

‘나이 든 토끼의 집’에는 토끼가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소개돼 있다. 5살이 넘은 토끼를 키우고 있다면 아래에 적힌 행동들을 토끼가 하는지 살피는 것이 좋다.

1. 화장실을 찾지 못해 어슬렁거리다가 아무 곳에나 볼 일을 본다.

2. 먹었다는 사실을 잊고 반려인에게 사료나 건초를 달라고 재촉하거나 굶주린 듯 격렬하게 먹는다.

3. 말을 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

4. 갑자기 발로 심하게 바닥을 쾅쾅 치거나 초조하게 식기류를 갉고 내던진다.

5. 공격적으로 변해 주인을 물거나 쫓아다닌다.

6. 좁은 장소에 들어간다.

7. 소음과 신호에 놀라거나 집 밖에 나와 있으면 즉시 숨거나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8. 자주 먼 곳을 바라본다.

9. 잠만 자고 있다.

랄라는 현재 이 중에서 4가지 정도의 행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료를 담아 준 그릇을 이유 없이 이로 물어 뒤집는 경우가 잦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쳐다본다. 아직 치매라고 볼 수는 없지만 랄라에게 변화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령 토끼와 함께하는 법

사료가 담긴 그릇을 엎어버린 랄라가 화가 났는지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다. 이순지 기자
사료가 담긴 그릇을 엎어버린 랄라가 화가 났는지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다. 이순지 기자

노령토끼의 행복을 책임지는 것은 결국 반려인이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반려인이 잘 간호를 해준다면 토끼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 토끼 관련 동물협회 등에 따르면 규칙적인 운동과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해 토끼 건강 관리에 신경 써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노령 토끼가 자주 얻는 병은 관절염, 치아 관련 질환, 요실금 등이다. 랄라는 이미 치아 관련 질환인 치근 농양에 시달리고 있다. 이틀에 한 번 목 옆 절개 부위에서 농양을 짜낸다. 노령 토끼로 구분된 5살이 되자마자 이 질병이 생겼다. 다행히 아직 농양 외에는 다른 질병은 없다.

관절염도 토끼를 괴롭히는 병이다. 토끼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토끼 뼈는 매우 가늘고 약하다. 토끼도 이런 점을 아는지 나이가 들어서는 어릴 때보다 느리게 움직인다.

병원에 자주 가는 것과 더불어 반려인이 노령 토끼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식단 관리다.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을 먹은 토끼들은 비만이 될 확률이 높은데, 사람처럼 비만 토끼도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건초를 충분히 주면서 사료는 종이컵의 2분의 1 정도만 주면 좋다.

생후 2달 된 랄라(왼쪽), 2살 무렵 찍은 사진(가운데), 이달 촬영한 랄라 사진(오른쪽). 이순지 기자
생후 2달 된 랄라(왼쪽), 2살 무렵 찍은 사진(가운데), 이달 촬영한 랄라 사진(오른쪽). 이순지 기자

귀찮을 수도 있지만 토끼의 건강 상태를 매일 살피고 식단 관리를 잘 해주는 것만으로 토끼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사실 토끼가 늙었다고 해서 꼭 슬픈 것만은 아니다. 경험에 따르면 어린 시절 랄라와 지금의 랄라는 나와의 관계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어릴 때는 그저 보살펴 줘야 하는 존재였지만, 지금은 나를 지켜주는 친구가 됐다.

사람처럼 토끼도 젊은 시절만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다.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집에서 잘 돌봐 준다면 나이 든 토끼도 인생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다.

이순지 기자 seria112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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