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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처 때문에 어그러진 삶… 생이별한 딸과 만날 수 있을까요

입력
2018.09.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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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저에게는 만나지 못하는 23세 딸이 있습니다. 1998년 아이가 세 살 때 이혼하면서 딸과도 이별을 했습니다. 부모형제 없이 어렵게 살아온 저는 금융회사에 다녔고, 아내는 옷 가게를 했습니다. 아내는 밝았습니다. 그런 점이 좋아 결혼했지만 불행했습니다. 아내는 빚이 많았고, 사채도 썼습니다. 빚을 대신 갚아줘도 눈덩이처럼 불었어요. 그런데도 아내는 제 명의로 카드를 여러 장 만들어 돌려 막았고, 할부로 승용차를 샀어요. 급기야 집이 경매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아내는 다 갚아줄 테니 걱정 말라며 오히려 큰 소리 쳤어요. 결국 이혼했습니다.

돈도 없고, 아이도 엄마를 따르기에 딸을 전처에게 맡겼습니다. 그렇게 전처와 딸은 전처의 친정으로 갔습니다. 저는 금융위기로 실직했고, 노숙도 했습니다. 건강이 나빠져 큰 수술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만 이 세상에 피붙이 딸이 있다는 것만 붙들고 어떻게든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10년 넘게 모질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사회복지 일을 하며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얼굴이라도 보려고 고등학생이던 딸을 찾았습니다. 얼굴도 가물가물해선지 학교 앞을 서성여도 누가 제 딸인지 모르겠더군요. 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돌아온 반응은 차갑더군요. 전처에게 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경찰에 저를 신고했어요. 접근금지 해달라며 범죄자 취급 했어요.

포기할 순 없었어요. 법원에 면접교섭을 신청했는데, 전처와 딸은 아빠가 갑자기 나타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진단서를 냈고, 법원은 전처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요. 딸이 대학생이 됐을 때 다시 찾았습니다. 등록금이라도 내주고 싶었거든요. 교수를 통해 제 번호를 딸에게 주었습니다. 딸이 처음 제게 전화해서는 “아빠가 죽으면 시체 처리는 해줄 수 있다”며 다시는 찾지 말라고 하더군요. 아빠 자격이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압니다. 해준 것도 없지요. 하지만 참담했습니다. 서로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슬프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이 시립니다. 한번만이라도 딸과 따뜻하게 만날 수 없을까요. 아마 엄마에게서 저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들었겠지요. 만나서 오해도 풀고 잘 지내고 싶습니다. 저와 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계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요.

서한수(가명ㆍ57ㆍ개인사업)


한수씨, 당신의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못 보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오랜 세월 그 고통에서 살았을 당신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참 아픕니다. 아무리 위로하려고 애써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요.

당신의 상황을 좀 보기로 하죠. 힘들게 컸고, 나름 성실하고 착실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죠. 평온했던 당신의 삶에 전처가 끼어든 거예요. 느닷없이. 그래요, 당신은 전처와 인생에서 만나지 않았어야 했고, 그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되었어요. 전처는 의도했든 안 했든 당신에게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 여자가 그럴 줄 몰랐다’는 배신감에 덜덜 떨리는 날이 있었겠죠. 결혼 이전의 빚까지 다 짊어졌고, 모든 것을 갖다 바쳤는데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당신에게 큰 소리를 쳤을 거예요. 빚을 떠안고, 실직하고, 이혼하게 됐죠. 하나뿐인 딸도 보지 못하게 됐죠. 누구라도 억울한 상황이에요. 안 억울한 게 이상한 거죠. 그런데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이 억울함을 안고 살았을 당신이 저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당신 딸은 어땠을까요? 딸도 억울할 겁니다. 부모의 이혼은 엄청난 충격이지요. 세 살 때부터였으니 아빠에 대한 기억조차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그리운 순간이 있었더라도 같이 하지 못한 아빠에 대한 원망이 더 컸겠지요. 딸의 잘못으로 부모가 이혼했나요. 그렇지 않아요. 딸도 억울하지 않겠어요. 사랑 받으며 자라야 했을 딸은 더 억울했을 겁니다.

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겠지요. 전처가 아빠에 대해 좋게 이야기할 리 없습니다. 딸은 아빠와의 추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빠의 빈 자리를 채우느라 엄마가 힘들게 자신을 키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엄마가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는, 딸에게 안 중요할 거예요.

부모는 자식을 낳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사랑하지만, 아픈 자식을 들쳐 안고 병원에 뛰어가거나 아이와 술래잡기를 하면서 더없이 기뻐하는 등의 사소한 일상으로 만들어진 인생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어요. 딸에게 당신은 그런 존재일 거예요. 그런 아빠가 갑자기 나타나 ‘나랑 친하게 지내자’라고 한단 말이죠. 당황스럽고 화가 나죠. 독한 말을 퍼붓겠죠. 딸의 심성에 상관없이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이런 상황이 당신은 얼마나 억울할까요. 당신의 어그러진 삶을 딸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죠. 오히려 엄마의 일방적인 얘기만 듣고 아빠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 크겠지요.

한수씨, 당신은 성실하고 착한 사람일 겁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겠죠. 그런 노력은 물거품이 됐어요. 딸이 보고 싶어서 전처를 찾아갔더니 범죄자 취급을 받았어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억울함이 쌓여 단단한 돌처럼 당신 가슴을 짓누르고 있어요.

한수씨, 딸도 분노하고 있을 겁니다. 딸은 아빠 역할을 못한 책임을 묻고 있어요. 이제 와서 등록금을 대준다고 덥석 받을 수도, 고마워할 이유도 없어요. 오히려 등록금을 앞세워 갑자기 아빠 노릇을 하려 든다고 오해하겠지요. 딸은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

한수씨, 억울함을 없애야 합니다. 전처와 딸이 없앨 수 없어요. 오롯이 당신 몫이에요.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전처와 결혼생활을 그 정도만 한 것, 더 엮이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딸도 그래요. 딸은 당신을 억울하게 만든 사람은 아니지요. 딸은 피해자예요. 다행히 외가에서 사랑받고 컸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딸이 아빠를 이해하기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딸과 관계 회복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딸이 좀더 어른스러워지고, 전처나 외가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때, 아빠에 대해 한번쯤은 다시 돌아보게 될 겁니다. ‘아빠를 너무 오해한 건 아니었을까’, ‘아빠도 힘든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날이 옵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아마도 당신이 억울함을 호소할수록 딸은 더 분노하며 멀어질 겁니다. 억울함보다는 딸을 그리워했던 마음을 전한다면 관계 회복하는 시간은 앞당길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한수씨가 노력해야 합니다. 막막한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겠지요. 순간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힘들겠지요. 고통스러웠던 세월만큼 기다릴 각오로 해보세요.

딸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그리움을 전하세요. 딸의 집 앞에 좋아하는 과일과 케이크를 놓고 가고, 딸이 결혼한다면 사위가 될 사람을 먼저 만나보고, 사위에게 딸에게 상처를 준 데 대한 미안함을 전달하고, 딸이 아이를 낳으면 장난감도 사주는 등의 사소하지만 정성 담긴 노력 말입니다.

딸은 당신을 밀어낼 겁니다. 힘들 겁니다. 수년이 걸릴 겁니다. 그 피나는 노력 끝에 행여나 딸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라는 말을 건네기라도 한다면, 그때 “같이 하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진심으로 말하세요. “나도 억울하고 고통스러웠다”는 말은 마음에 묻어두세요. 딸도 당신만큼 고통스럽고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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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씨, 알아요 당신은 잘못 살지 않았어요. 아내를 잘못 만난 대가가 너무나 혹독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제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그 결정은 한수씨가 스스로 한 것입니다. 후회해도 억울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잘못된 결정을 합니다. 하지만 이겨내야죠. 전처랑 자식 하나만 낳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이혼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딸이 별탈 없이 대학을 다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이제 스스로 행복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현재로선 당신이 그걸 딸에게 알려줄 필요도 없고, 알린다고 듣지도 않을 겁니다. 당신을 위해 좋은 인연을 만나고, 여행을 가고,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그렇게 행복하십시오. 당신 마음 안에 있는 억울한 고통을 버려야 행복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정리=강지원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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