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배우와 코미디언을 구분하지만, 외국에선 ‘코미디 배우’라고 해요. 짐 캐리, 로빈 윌리엄스 모두 희극인 겸 배우죠. 희극을 잘 하는 사람은 비극도 잘 할 수 있는 소지가 많지만, 정극에서는 그런 역할보다는 감초 역할이 주로 주어져요. 이 무대에서는 우리도 연기를 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거예요.”
‘코미디언’이라는 명칭에서 무대 위 ‘배우’로 불리게 된 소감을 묻는 질문에 박미선(51)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서울 혜화동 굿씨어터에서 14일 개막하는 ‘홈쇼핑 주식회사’ 무대에 선다. 2003년 이후 첫 연극이다. “나이 50세가 되면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실천하기 시작했다. 도전하면서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그는 최근 태어나 처음으로 머리를 탈색하기도 했다.
그 도전 중 하나인 ‘홈쇼핑 주식회사’는 홈쇼핑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쇼 호스트 3인의 이야기다. 연극이지만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을 취한다. 박미선과 함께 무대에 서는 코미디언 권진영은 “일반적인 연극보다 현장성이 가미됐다”며 “현장 관객과 맞부딪히며 애드리브를 할 수 있는 코미디언 출신들이 무대에 선다”고 설명했다. 개그콘서트 등을 쓴 김은미, 최영주 작가가 공동으로 극본ㆍ연출을 맡았다. 박미선, 권진영, 이은지가 한 팀을 이뤄 무대에 선다. 선배 박미선은 자신의 도전을 통해 후배들에게 무얼 주고 싶을까. 후배들은 박미선의 도전에서 무얼 보고 있을까. 연습에 한창인 세 사람을 최근 공연장에서 만났다.
-코미디언들이 ‘쇼’가 아니라 ‘연극’에 출연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박미선(이하 박)= “재미있을 것 같아서 출연했어요. 같이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요. 중년이 되어도 많은 걸 즐거워하면 제 또래 분들도 활력을 얻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어요.”
권진영(이하 권)=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어요. 연극이 처음은 아닌데 극으로 접근하면 너무 무겁고, 개그로 하면 방송에서의 모습과 똑같을 듯해 고민을 했어요.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내 대사를 하기에 바빴는데, 연극은 다른 배우들의 대사를 듣고 거기에 반응하면서 맞춰가면 된다는 감을 좀 잡은 것 같아요.”
이은지(이하 이)= “코미디빅리그로 데뷔한 지 5년 됐어요. 저도 연극은 정말 큰 도전이에요. 저는 요즘 수업을 들으러 오는 거 같아요. 미선 선배, 진영 선배가 세심하게 연기 지도를 해주세요.”
권= “전 요즘 학교에서 못 배웠던 걸 미선 선배한테 배우고 있어요. 연기를 정말 잘하세요. 박미선 배우는 드라마에 나가도 되겠다 싶어요.(웃음)”
박미선은 최고의 연예인이었다가 말 실수로 바닥까지 추락한 신데라 역을 맡는다. 홈쇼핑을 통해 재기하겠다는 목표로 관객들에게 치열하게 웃음을 전달한다. 다른 두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는 ‘쇼호스트계의 여왕’, 그리고 ‘쇼호스트계의 떠오르는 신예’ 역을 맡는다. 박미선은 후배들과 호흡을 맞춰주는 동료로서의 역할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신데라를 통해 박미선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전 그냥 저예요. 실제로 방송이 힘들었을 때 홈쇼핑을 했던 경험도 있고, 제가 하는 한탄이랑 제 애기가 많이 녹아 있어요. ‘전화기가 1,000개 있으면 뭐하나. 필요할 땐 막 찾다가 단물 빠지니 아무도 안 찾네’라는 독백 대사도 그렇게 들어간 거예요. 제 이야기 같아요. 근데 후배들은 실제 자신과 다른 모습이라 힘들 거예요.”
-방송에서 여성 코미디언들이 설 자리가 많지 않다고 하잖아요.
박= “코미디언, 배우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렇잖아요. 유리천장 뚫기 어렵죠. 그래도 미투 운동도 그렇고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분위기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저는 여자이고 특히 나이가 들수록 입지가 점점 좁아졌는데, 결국 제가 개척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여성 무대가 없는 건 확실하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후배들에게도 자극을 많이 받아요. 유투브로 영상도 많이 보고, 자꾸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개인방송도 준비 중이에요.”
권= “‘왜 요새 TV 안 나와요?’ 라는 말을 듣는데,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웃음) 저도 미선 선배 보면서 자극 많이 받았어요. 무대에서 뭐라도 해야 훈련도 되고 입도 안 굳으니까요.”
박= “의욕적으로 살기를 바라요. 저도 제가 50세가 될지 몰랐어요. 마음이 급하니까 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게 돼요. 물론 쉴 때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완전히 쉬어야죠. 전시회도 가고, 공부도 하고요.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항상 들어요.”
권= “저번에 김연자씨의 ‘아모르파티’ 들었잖아요.”
박= “그건, 토크쇼 ‘여탕쇼’ 때문에. 기획하고 연출도 했거든요. 공연 두 개를 하고 있어요.”
‘여탕쇼’는 18세 이상 여성 관객만 관람 가능한 개그토크콘서트다. 지난달 4일 강원 춘천에서 첫 공연을 했다. 권진영은 ‘여탕쇼’에서도 함께 한다.
-‘여탕쇼’ 반응은 어떤가요?
권= “생각보다 반응이 좋더라고요. 미선 선배는 주인공도 조연도 가능한 사람이에요. 진지하게 진행하다가 엄청 웃긴 말도 하면서 멀티플레이어예요.”
박= “30년 했으니까 노하우가 생긴 건가.(웃음) 무대 위에서 여자들이 자기 이야기, 하소연 하는 토크콘서트예요. 방송에서 제가 야한 얘기하고 욕 하는 거 본 적 없으시죠? 그런 새로운 모습 보여드리는 거죠. 공연 보고 싶으신 남성분들은 여장하고 오셔야 해요. 불러만 주시면 전국 순회 공연 할 생각이에요.”
-같이 공연하는 후배들이 많이 따르네요. 맏언니로서 부담감을 느끼진 않나요?
박= “제가 1988년 데뷔인데 현역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엔 정말 제가 맏언니인가요? 그런데 제가 윗사람이라는 생각은 없어요. 후배들이랑 거의 친구라고 생각해요. 후배들이 잘하면 제가 따라 해요. 하다못해 스마트폰 다루는 법도 배우고요. 저는 저대로 후배들과 똑같이 경쟁하는 사람이에요. 후배들에게도 경쟁해서 절 이기라고 해요.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정글 같은 곳이잖아요.”
-롤 모델이 있을까요?
박= “저는 송해 선생님이에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팔도 유람 다니면서 일하고 싶어요. 저도 실버 세대의 아이콘이 되고 싶어요.”
권, 이= “박미선 선배님이죠. 좀 더 자고 싶을 때 선배 이야기 생각하면서 일어나요. ‘잠은 죽어서 자면 된다’고요.”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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