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치열하고 골치 아픈 구직 시장에 갑자기 ‘센 놈’이 끼어들었다. 인공지능(AI)이다. 첨단 느낌 물씬 나는 이 단어를 듣기만 해도 주눅 드는데, 글쎄 저놈이 나를 평가한단다. 바늘구멍을 통과하려고 한숨 짓고 있는 구직자들은 ‘이건 또 뭔가’ 싶다. ‘이제 AI한테까지 잘 보여야 하나.’
채용 절차에 AI를 도입한 기업들은 한결같이 강조한다. AI는 채용 과정을 더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도대체 AI가 구직자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기업마다 다양한 AI 채용 시스템의 내부를 들여다봤다.
지난 합격자들과 얼마나 비슷한가
AI의 성능은 데이터가 좌우한다. 인간으로 치면 뼈대에 해당하는 하드웨어나 뇌에 해당하는 알고리즘(문제 해결해 필요한 계산식)이 아무리 훌륭해도 데이터의 양과 질이 부족하면 똑똑한 사람만 못하다. 현재의 AI 기술은 컴퓨터가 양질의 수많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해 스스로 최적의 해법을 찾아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AI 채용 시스템은 각기 다른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 구직자들 입장에선 AI 심사의 합격 여부가 어떤 데이터를 학습한 AI에게 평가받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전 계열사 채용에 적용하는 롯데그룹의 AI 시스템은 지원자가 조직과 직무에 얼마나 적합한지를 판별하는 게 핵심이다. 롯데의 정보기술(IT) 계열사인 롯데정보통신은 최근 3년 내 지원자들의 자기소개서와 업무평가 결과를 기초 데이터로 삼아 자체 AI 채용 시스템을 개발했다. 채용에 참여한 사람들과 입사해서 높은 성과를 올린 사람들의 자기소개서, 업무평가 내용 중 긍정적, 부정적인 면을 균등하게 뽑아 대규모 데이터를 구축해 이를 AI에게 심층 학습(딥러닝)시킨 것이다. 그리고 계열사별로 원하는 조건에 대한 가중치를 적용해 몇 가지 유형의 인재풀을 만들었다.
지원자가 제출한 자기소개서는 이 인재풀에 들어 있는 글들과 비교 분석된다. 일반적인 검색엔진의 비교 방법과 전혀 다르다. ‘열정’이나 ‘최선’ ‘성공’ 같은 자기소개서 단골 단어를 많이 쓴다고 해서 결코 유리하지 않다. 단어 하나하나뿐 아니라 문장의 구성, 내용의 일관성 등을 AI가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딥러닝 기법의 묘미가 있다. 이종호 롯데정보통신 상무는 “문장의 연결 관계나 문법 구조 등에서 지원자들 간 미묘한 차이를 짚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AI는 자기소개서의 ‘스토리 라인’에도 주목한다. 가령 지원자가 ‘어릴 때 유명인사 누구를 보며 꿈을 키웠다’라고 썼다면 이후 꿈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꼼꼼히 따라간다. 그 내용이 얼마나 지원자의 경험을 진실하게 담고 있는지를 포착하기 위해서다. 이 상무는 “AI는 문장들이 이어져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며 “일반적으로 자기소개서의 후반부로 갈수록 지원자들 간 격차가 커진다”고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AI는 자기소개서에서 지원자가 해당 직무에 적합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을 부각해 인사담당자에게 제시한다. 인사담당자들은 이를 서류전형 합격 여부를 판단하는데 참고자료로 활용하게 된다.
올 하반기 8개 계열사에 처음 도입되는 CJ그룹의 AI 채용 시스템도 유사하다. CJ의 AI는 기존에 접수됐던 자기소개서 중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들을 회사 고유의 인사평가 항목별로 내용을 추려 학습했다. 이를 지원자의 자기소개서와 비교한 다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 인사 담당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AI의 역할이다. 결국 롯데와 CJ의 AI 채용 시스템은 최근 합격자나 사내 성과가 좋은 젊은 직원과 유사성이 높은 지원자들을 뽑아내는 방식인 셈이다.
원하는 인재상에 얼마나 가까운가
SK그룹은 조금 다르다. SK㈜ C&C가 개발한 AI 채용 시스템은 학습에 필요한 기본 데이터로 기존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인사 담당자들이 직접 만든 문장들을 활용했다. 계열사별 인사 담당자들이 자기소개서 평가에 활용할 수 있도록 창작한 문장들을 모아 기업이 원하는 고유의 인재상 데이터를 구축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전문성이 중요한 연구직군의 인재상을 반영하기 위해 ‘저는 해외 학회에 논문을 여러 번 발표했고,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같은 문장을 데이터에 넣는 식이다. SK의 AI는 이들 문장으로 이뤄진 인재상 데이터를 학습했다.
지원자가 제출한 자기소개서는 전문성, 성취도 같은 세부 평가 항목에 따라 문장 단위로 나뉘어 인재상 데이터와 비교 분석된다. 그 결과 항목별 점수와 신뢰도를 바탕으로 최종 점수가 산출된다. 이후 AI는 인사 담당자들이 제시한 합격선 점수 이상의 자기소개서를 선별해 제시하고, 이들이 서류전형 이후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스템은 인사 담당자가 사전에 작성한 문장의 양과 질에 따라 성능이 좌우되기 때문에 인사 담당자들의 책임이 더 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AI가 인간의 역할을 오히려 강화한 것이다.
베낀 자소서 솎아내기는 기본
다른 글을 베껴 쓴 자기소개서를 걸러내는 건 대다수 AI 채용 시스템의 기본 기능이다. AI 채용 도입 이전부터 자사 온라인 채용 사이트에 표절 자기소개서를 가려내는 기능을 넣어둔 기업도 적지 않다. 베낀 자기소개서를 AI가 찾아내는 원리는 학술논문 표절 여부를 심사하는 기존 소프트웨어들과 유사하다. 자체 확보해둔 자기소개서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같은 단어가 연속으로 나오거나 일치하는 문장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 표절 가능성을 의심하는 식이다.
단 그 기준은 기업별로 다르다. 올 상반기 채용 서류전형에서 롯데는 AI 심사를 통해 전체 자기소개서의 1.9%를 표절이라고 판별해냈다. 당시 롯데는 약 50억 건의 글과 지원자 자기소개서를 비교해 단어 5개가 연속해서 중복되거나, 똑같이 이어지는 문장이 전체의 약 10%면 표절로 판단했다. AI 채용 도입 초기니만큼 다소 보수적인 기준을 적용했다는 평가다. 하반기부터 이 기준은 바뀌었다.
표정 목소리 정보도 학습
IT 중소기업 마이다스아이티가 개발해 LS그룹, 한미약품, 한국정보화진흥원을 비롯한 390여개 기업에 공급한 AI 채용 시스템은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 같은 외형 정보를 데이터로 이용했다. 면접 전문가 120명에게 평가를 받은 수많은 사람의 면접 영상과 음성 데이터에서 표정과 목소리 정보를 추출해 어떤 정보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학습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스템으로 채용에 응시하는 사람은 컴퓨터 앞에서 직접 마이크에 대고 질문에 답변하면서 평가를 받게 된다. 그동안 AI는 답변 장면을 영상과 음성으로 나눠 저장한다. 답변이 끝나면 AI는 영상에선 지원자의 표정과 위치, 움직임, 전체적인 자세 정보를, 음성에선 목소리의 크기와 높낮이, 빠르기, 자주 사용하는 단어 등의 정보를 추출한다. 이어 지원자는 이마 앞부분에 있는 뇌 전전두엽의 기능과 관련된 역량을 측정하기 위한 온라인 게임에 응시하게 된다. 전전두엽은 기억력과 사고력 같은 인지기능을 주관하는 영역이다. AI는 지원자에게서 추출한 정보와 게임 결과를 종합해 최종 점수와 적합한 직군 등을 제시한다. 이현주 마이다스아이티 연구원은 “자기소개서는 지원자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어렵다”며 “주관적 판단이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난 공정한 평가를 제공할 수 있도록 면접용 AI를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과거 인재≠미래 인재
AI 심사를 앞둔 구직자 입장에선 ‘기계에 내 미래를 맡겨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대부분 AI의 평가를 아직은 인사 담당자나 면접관의 참고자료 정도로 활용하고 있다. AI 심사는 피로나 시간 부족, 주관 개입 같은 인적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보완책이라는 것이다.
AI 기술이 구직자를 판단하는 근거가 현재로선 글 잘 쓰거나 발표 잘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조형준 SK C&C 에이브릴유닛 수석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했는데 핵심 내용은 없거나 실적을 그럴듯하게 과대 포장한 자기소개서는 AI가 충분히 걸러낼 수 있다”며 “글을 잘 쓰려 하기보다 자신의 경험이나 업무 성과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일부 온라인 구직자 카페 등에선 AI 심사를 쉽게 통과하기 위한 팁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AI 채용 담당자들은 입을 모은다. AI 알고리즘은 기업이나 직무에 따라 지원자의 역량별 가중치를 두기 때문에 한두 가지를 잘한다고 해서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AI 채용 시스템이 모두 ‘과거’의 데이터를 학습했다는 점은 분명한 한계로 지적된다. 미래 인재를 과거 인재와 비교해 뽑는 것이다. 시장과 기업 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수년 전과 올해의 인재상이 같을 수 없다. AI 채용 시스템 개발자들 사이에선 이미 기업의 미래에 적합한 인재를 찾아내는 기술 연구가 한창이다. AI 발전 속도로 볼 때 머지않은 장래에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AI 채용 기법이 등장할 것이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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