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말이죠. 전두환 대통령? 치매 걸린 거 같던데요.”
잘못 들었나 싶었다. 2013년이 아니면 2014년이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와 저녁 자리가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그도 기자를 앞에 둔 불편함을 개의치 않았다. 대부분 첫 만남이 그렇듯, 건조한 대화들이 한 두 시간 오갔다.
그의 입에선 전 전 대통령을 수사하면서 자택에서 만났던 인상, 자신이 왜 치매를 의심하게 됐는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이어졌다. 차 한 잔 하라고 하곤 몇 분 지나 ‘당신이 누군데 여기 앉아 있느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는 얘기들. 당연히 의학적 근거는 없었다. 반응이 시큰둥했는지 그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기억은 금세 잊혔고, 지금은 검사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다.
없는 척 하던 기억을 되살린 건 ‘남편이 현재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전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씨 말이었다. 2013년 진단을 받고 지금까지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건데, 당시 만난 시점을 생각하니 검사 말이 허언이 아닐 수 있겠다 싶기도 하고, 더 캐물어봤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순자씨는 진심일지 모르겠지만, 신빙성을 두고 설왕설래다.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를 비난했다가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 전 대통령 재판을 하루 앞두고 나온 말. 재판을 피하기 위한 ‘술수’라는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이학봉 전 보안사 대공처장 빈소(2014년), 모교 대구공고 체육대회와 동문가족 골프대회(2015·2016년) 등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증언도 있다. 반면 2013년 검찰 수사와 자택 압수수색에 대한 충격을 이유로 들면서 인지능력과 기억력에 분명 이상이 생겼다는 측근들 증언도 여럿 있다. 직접 보지 않았으니 뭐가 사실인지 모를 일이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당장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편함이 거북하다. 그의 건강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건 아니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는 철학자 니체 말이 자꾸 떠올라서 속이 불편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후회 없는 삶’은 책에서 읽고 일기장에나 쓸 수 있는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결정을 내리고 잠시 뒤 한숨을 쉬며 후회를 하는 게 인간이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때 왜 그랬을까’ 그리고 후회는 언제나 ‘기억’에서 출발한다.
전 전 대통령은 그래서 의문이었다. 1995년 12월 5·18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교도소에 수감이 된 이후 그의 얼굴에서 ‘후회’라는 감정을 본 적이 없다. 고작 8개월 형을 살다 사면된 뒤 백담사에서 칩거할 때도 억울함이 먼저였고, 회고록에서는 오히려 전직 대통령의 당당함이 느껴져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고 궁금했고, 그날 광주에서 벌어졌던 폭행, 윤간, 살인이 그저 우리만의 기억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몇 년 전 본보에 실린 칼럼(2013년 12월 11일자 편집국에서/최윤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꾸준히 성장해왔고, 그러리라 믿는다. 국가정보원 같은 국가기관의 대선 오염 의혹이 온갖 정황과 관련자 진술로 스멀스멀 드러나도, 대통령이 끝내 특검을 거부해도,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큰 골격은 훼손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전제 하나를 더하고 싶다. 한 집단을 고의로 희생시킨 누군가는 반드시 역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하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건강을 빈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그는 아직 자신의 기억을 지울 자격이 없다. 10월 1일 광주지법 201호 법정에서는 연기된 재판이 다시 열린다. 그에게 아직 기회는 있다.
남상욱 사회부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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