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득점포만 터졌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던 경기였다.
한국-칠레의 국가대표 평가전이 열린 11일 수원월드컵경기장은 콘서트 장을 방불케 했다. 두 팀이 득점 없이 비기는 바람에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의 뜨거운 함성이 최고조에 이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었다.
경기 전부터 분위기는 뜨거웠다.
킥 오프가 두 시간 남았는데 붉은 색 옷을 입은 팬들이 출입구에 길게 줄을 섰다. 경기장 곳곳에 암표상도 등장했다. 지난 7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코스타리카전(3만5,000석ㆍ한국 2-0 승)에 이어 이날도 4만 석이 매진됐다. 축구대표팀 경기가 두 경기 연속 매진을 기록한 건 2006년 이후 12년 만이다. 이날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이승우(20ㆍ베로나)가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전광판에 나올 때마다 자지러지듯 함성이 터져 나왔다. 조준헌 축구협회 홍보팀장은 경기 전 “10대 소녀 팬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에서 보듯 관심도가 전 연령대로 고르게 확대됐다”며 “오늘 경기만 잘 했으면 정말 좋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2위 칠레는 강했다.
간판 공격수 알렉시스 산체스(30ㆍ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빠졌지만 공격형 미드필더 아르투로 비달(31ㆍFC바르셀로나) 등 상당수 정예 멤버가 방한한 칠레는 2015년과 2016년 코파아메리카(남미축구선수권) 2연패를 차지한 팀다웠다.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 머물러서 시차도 적응돼 있었다. 칠레와 일본의 평가전은 지진 여파로 취소됐다.
칠레는 강한 압박으로 한국 선수들을 몰아쳤다.
비달은 혀를 내두르는 엄청난 활동량을 선보였다. 기술 좋은 칠레 선수들이 한국 선수들에게 둘러싸이고도 재치 있게 위험 지역을 빠져 나오자 관중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한국은 상대 압박에 밀려 골키퍼 김진현(30ㆍ세레소 오사카)과 수비수들이 여러 차례 패스 미스를 범해 위기를 자초했다.
한국도 투지 있게 맞섰다.
최전방 스트라이커와 측면 날개로 선발 출전한 황의조(26ㆍ감바오사카), 손흥민(26ㆍ토트넘)의 조합이 좋았다. ‘혹사 논란’이 불거진 손흥민은 코스타리카전에 이어 2경기 연속 완장을 차고 이날도 헌신적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오른쪽 날개 황희찬(22ㆍ함부르크)은 가장 눈에 띄었다. 특유의 저돌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를 종횡무진 헤집었다.
후반 중반 양 팀은 한 차례씩 상대 간담을 서늘케 했다.
후반 17분 비달이 완벽한 찬스에서 날린 발리 슛이 허공으로 떴다. 한국도 4분 뒤 이재성(26ㆍ홀슈타인 킬), 장현수(27ㆍFC도쿄)가 연이어 위협적인 슛을 때리며 응수했으나 골로 연결되지 못했다. 후반 추가시간 칠레 디에고 발데스(24ㆍ모렐리아)가 골과 다름 없는 일대일 기회를 포착했지만 마지막 슛이 어이 없이 허공으로 뜨며 경기는 0-0으로 마무리됐다.
새롭게 한국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파울루 벤투 감독은 첫 A매치 2연전을 1승1무로 마감했다.
두 경기 내용을 보고 ‘벤투호’의 경기력을 평가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벤투 감독이 빠른 공수 전환과 템포를 가장 강조한다는 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는 전반 막판 상대 코너킥을 골키퍼 김진현이 잡아 수비수 이용(32ㆍ전북)-공격수 황의조로 연결한 번개 같은 역습이 나오자 여러 차례 박수를 쳤다. 벤투 감독은 후반 들어 득점이 나올 듯 나올 듯 안 나오자 심판에게 뭔가를 항의하고 손흥민 돌파가 아웃 됐을 때 안타까워하는 등 벤치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원=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l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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