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민족 인정하는 의미 잃어
“전례 없는 팔레스타인 적대 노선” 평가
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행보에 거침이 없다. 팔레스타인의 워싱턴사무소를 폐쇄하고, 전쟁ㆍ반인도적 범죄를 다루는 상설 국제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ICC)까지 반 이스라엘 성향을 이유로 제재할 뜻을 내비쳤다.
10일(현지시간) 미 국무부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공식 대미 연락사무소라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워싱턴사무소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보수단체 연설에서 “미국은 항상 우리의 친구이자 동맹인 이스라엘 편에 설 것”이라며 “팔레스타인이 협상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워싱턴사무소를 열어두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성명을 통해 유감을 표명했다.
현재 미국은 팔레스타인 정부와 직접 소통하고 있기 때문에 PLO 워싱턴사무소의 실질적 의미는 없다고 외교관들은 평가했다. 그러나 20년 이상 국무부에서 이스라엘-아랍 문제를 맡아 온 미국 싱크탱크 윌슨국제학센터의 에런 데이비드 밀러 선임연구원은 “PLO 사무소의 존재는 미국이 팔레스타인 민족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상징적 의미였다”라며 “이 정부는 전례 없는 팔레스타인 적대 노선을 걷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불똥은 국제형사재판소(ICC)로까지 튀었다. 볼턴 보좌관은 이날 ICC를 “불법 재판소”라고 칭하며 “ICC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지원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ICC가 스스로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볼턴 보좌관은 시리아ㆍ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의제를 거론하며 ICC를 비판했지만, 기본적으로는 ICC가 팔레스타인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의 반인도적 행위에 대한 예비 조사 절차에 착수한 데 대한 대응으로 해석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예루살렘을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했다. 팔레스타인은 “미국이 중재자 역할을 저버렸다”라며 강하게 반발, 이후 트럼프 정부 주도의 협상을 거부해 왔다. 반대로 트럼프 정부는 팔레스타인을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강경 압박책을 고수하고 있다. 8월 말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으며, 다른 국무부 차원의 지원금도 속속 삭감하고 있다.
하지만 압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후 미국의 주요 이슬람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요르단 등은 표면상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면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강경 정책을 지지하며 트럼프 정부와 밀월을 과시하고 있지만, 내부에서는 지나친 압박이 더 큰 혼란을 부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올해 들어 가자지구를 장악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군 사이 교전이 급증하고 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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