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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국토 종단한 발달장애1급 아들과 아버지 “희망의 증거 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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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국토 종단한 발달장애1급 아들과 아버지 “희망의 증거 될래요”

입력
2018.09.06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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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구 폴미첼코리아(주)대구지사 대표를 칭찬합니다

/그림 1발달장애1급 아들과 자전거로 국토 종단한 강석구 씨. 5년간 3,000킬로를 달려 전 국토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강은주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그림 22016년 제주도에서 2박3일간 250km를 완주한 후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강석구 씨 제공.

아들은 성장이 늦었다.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다. 의료, 교육, 음악, 미술 치료 등 경제적 비용을 감수하고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집도 날리고 상가도 날렸다. 통장이 텅 비었다. 월세를 살아도 아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은 3~4세 때 겨우 걷기 시작했다. 7~8세 때 바퀴 4개 달린 특수자전거를 제작해서 가르쳤다. 넘어지고 다치고 매일 상처투성이였다. 집사람이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다. 결국 포기했다. 부모 욕심이었다.

강형욱(25)씨와 아버지 강석구(52)씨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타고난 체력가다. 어린 시절에는 ‘강장군’이라 불렸다. 태권도를 익혔고 공수부대 특전사로 군복무를 했다. 탄탄한 체력과 활달하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제대 후 입사한 유통회사에서 5년 영업소장에 올랐다. 최단기에 최연소 기록이었다.

화창한 날만 계속될 줄 알았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들은 3살이 되어도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다. 서울, 부산 등 전국의 병원은 다 다녔다. 병명은 없고 단지 발달이 늦다고만 했다. 답답했다. 침 치료, 기 치료에 심지어는 굿도 해봤다. 어느 순간 울분과 원망이 생기며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외삼촌과는 옆 동네에 살며 각별한 사이였다. 어느 날 외삼촌이 작정하고 찾아오신 듯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네 살 길은 교회뿐이다. 교회에 가라”고 하셨다.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웃어 넘겼다. 며칠 뒤 외삼촌이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교회에 가라는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40이 되어 교회를 가게 된 이유다. 2013년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구호의 ‘아버지 학교’를 알게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우리 가정을 위해 내가 먼저 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손자를 보며 ‘우리 아들 등골을 빼먹는다’며 절망의 한숨을 쉬시는 아버지를 위해 당신 살아생전에 뭔가를 보여드리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고물상에서 5만원을 주고 자전거를 샀다. 아내에게 먼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다. 엄마가 자전거 타는 것을 보고 아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위해서였다. 아내가 1주일 만에 자전거를 탔다. 옆에서 지켜주던 아들도 놀랐다. 부부는 ‘욱이는 못 탄다’면서 비아냥거렸다. 직접 침투가 아닌 공중, 수중 침투 전략이었다. 전략은 적중했다. 자전거를 스스로 잡았다. 피나는 노력 끝에 드디어 아들 혼자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아파트 5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아내가 아들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지르며 맨발로 뛰어내려왔다. 아들이 20살 되던 해였다.

학교운동장을 돌다가 좀 더 넓은 데로 나갔다. 금호강 자전거 길을 달렸다.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달렸고 아버지는 뒤에서 뛰었다. 아들은 체력과 폐활량이 모두 좋았다. 하드웨어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자전거를 타면 지치지도 않고 신명나게 달렸다. 아내는 혹시라도 위험상황에 대비해 늘 픽업장소에 대기했다. 온 가족이 아들이 자전거 타는 것에 몰입했다.

“늘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께 손자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대구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해 저녁 6시에 창녕 보에 도착했습니다. 한여름 땡볕 아래 땀범벅이 되어 도착한 모습을 보고 아버지께서는 깜짝 놀라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들은 이후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행동에도 변화가 생겼다. 흥이 났고 희망이 생겼다. 내친김에 ‘아들과 함께 하늘아래 끝동네까지 달려보자’고 결심했다. 낙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4대강 종주와 인천에서 부산, 춘천에서 부산까지 국토종주를 했다.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도 고성 통일 전망대에서 부산 해운대 구간과 제주도에서 울릉도 일주를 통해 5년간 3,000킬로를 달렸다. 전 국토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것이다. 아내와 딸의 차량 픽업의 도움으로 설악산 대청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백두대간 종주와 제주도 백록담과 울릉도 성인봉, 대구 가산산성과 팔공산 환성산 초래봉과 대구분지를 둘러싼 봉우리와 능선을 종주했다.

“전국을 다녔지만 주변경관은 못 봤습니다. 아들 뒤에서 ‘엉뚱한 길로 가지는 않을까’ 모든 것을 케어하며 감독과 코치를 했습니다. 오로지 아들의 엉덩이, 헬멧, 등짝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지요. 달리는 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모든 것이 소진되었습니다.”

계획을 실천할수록 꿈이 더 커졌다. 아들과 함께 미국 뉴욕에서 LA까지 6,000킬로를 자전거로 종주하는 것이 다음 목표다.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주어진 삶의 의미를 깨달은 느낌입니다. 우리 가족이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고 장애인 가정의 꿈이 될 수 있다는 것, 포기는 배추포기를 셀 때나 사용한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오늘도 힘차게 나아갑니다, 아자!”

강은주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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