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나이키 운동화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80년대 후반 등장한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라는 멋들어진 광고 카피는 가슴을 뛰게 했다. 한국에선 “시작합시다”로 표현된, 직역하면 ‘일단 해 봐’ 의미인 이 문구보다 매혹적인 기업 슬로건은 못 본 것 같다. 실제로 이 한마디는 ‘나이키 제국’ 수립을 완성케 했다. 나이키가 올해 30주년을 맞은 ‘저스트 두 잇’ 캠페인의 기념 광고를 제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광고 모델 선정이 미국 사회에서 꽤나 화제가 된 모양이다. 주인공은 전직 미 프로풋볼(NFL) 선수인 콜린 캐퍼닉(31). 한국에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미국에서 그는 ‘무릎꿇기 시위’라는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있는 문제적 인물이다. 골치 아픈 논란을 유발한 장본인을 광고 모델로 쓰는 건 일종의 금기인데도, 나이키는 이를 깼다. “정치적 격론 속으로 나이키가 돌진했다”는 평가가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캐퍼닉은 2016년 8월 경기 시작 전 국가 연주 시간에 기립하는 대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당시 경찰에 의한 흑인 총격 사망 사건들에 대한 항의였다. 그는 “흑인과 유색인을 억압하는 나라의 국기엔 자긍심을 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인종차별 반대’라는 추상적 구호를 넘어, ‘국민의례 거부’라는 구체적 언행의 파장은 컸다. ‘애국심이 먼저냐, 인종평등이 먼저냐’의 논란이 불거졌고, 여론은 극명히 갈렸다. 캐퍼닉은 그 여파로 이듬해 3월 소속팀과의 계약 종료 후 1년 넘도록 무적(無籍) 상태다. 이에 더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향해 “애국심이 없다. 망할 자식”이라고 막말을 퍼붓고, 무릎꿇기 시위에 동참한 다른 NFL 선수들도 비난하면서 이 사안은 정치적 논란으로까지 비화됐다.
나이키의 결정은 파문의 당사자인 캐퍼닉에 대한 지지 선언이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윤 증대가 최우선인, 그래서 정권 눈치도 살펴야 하는 기업으로선 보기 드문 선택이었다. 매출 감소와 권력의 보복, 두 위험을 한꺼번에 무릅썼다는 점에서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도 할 만하다. 한국 대기업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전장(戰場)’ 한복판에 뛰어들어 권력과 맞서는 모습을 적어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이키의 행보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자본의 포식성이 느껴져서다. 자본은 그 속성상 ‘상품 가치’만 있다면 무엇이든 체제 내로 빨아 들이고, 흡수하며, 용해시킨다. 저항의 에너지조차 자본의 포획 대상에선 예외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혐오했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사후 ‘낭만적 이미지’로 상품화해 소비(90년대 후반 한국에서의 체 게바라 열풍도 그랬다)된 건 대표적 사례다. “고객들이 ‘캐퍼닉의 저항을 지지한다’에 나이키가 ‘큰 돈’을 건 도박을 하고 있다”는 CNN의 분석은 정곡을 찌른다. ‘캐퍼닉 광고’ 문구인 “무언가를 믿어라. 모든 걸 희생한다는 뜻일지라도”가 나이키 스스로에 건넨 말은 아닌 듯싶다.
물론 이런 의심은 삐딱하게 관성화한 나의 사고 회로 탓이다. 요즘엔 솔직히 ‘진짜 속내’가 무엇이든 ‘최소한의 선의(善意)’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선의들에 의해서도 우리 사회가 앞으로 전진했음을 역사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선의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타자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 발현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핵심은 타인의 고통과 아픔,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 아니 ‘공감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문득 재임 중 국민의 슬픔에도, 퇴임 후 국민의 분노에도 공감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한 정치인이 떠오른다. 혹시 그는 아직도 “국민들이 내 뜻을 몰라준다”면서 공감 받기만을 바라고만 있는 것일까.
김정우 국제부 차장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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