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모습 등 국영방송서 방영
“레닌 못잖은 개인숭배” 비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느닷없이 TV 리얼리티 쇼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0대 청소년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대화를 나누고, 갈색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오르며 산딸기를 주워 담는 등 소탈한 모습을 어필했다. 대국민담화에도 불구하고 연금 개혁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앉자, 인간미를 부각시키는 감성전략으로 호소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연금 개혁의 근본적 해법보다는 이미지 정치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 2일 저녁 러시아 국영방송 로씨아 1 채널에는 푸틴 대통령의 일상을 다룬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모스크바, 크렘린, 푸틴’이란 제목의 영상에서 푸틴 대통령은 학교를 찾아 청소년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누거나, 국내 드라마에도 등장했던 러시아 노래 ‘백학’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원로 국민가수 이오시프 코브존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또 지난 달 시베리아 투바 지역에서 유유히 휴가를 즐기는 모습도 전파를 탔다. 산등성이를 오르며 하이킹을 하고, 야생 딸기를 직접 주워 담거나, 야생 동물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주를 이뤘다. 이 장면에 등장한 진행자는 “야생이고 곰도 있다. 만약을 대비해 경호원들이 적절히 무장하고 있지만, 곰이 푸틴 대통령을 본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적절히 알아서 처신하지 않겠냐”는 황당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의 존재감이 너무 커 야생 동물인 곰조차 힘을 쓰지 못한다는 취지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외신은 푸틴 대통령이 국영TV에 하루도 빠짐 없이 등장했지만, 리얼리티쇼 출연은 처음이라며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보도했다. 크렘린 궁은 이번 프로그램이 순전히 방송사가 기획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야권에선 소련 시절 블라디미르 레닌에 대한 개인숭배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비꼬았다.
푸틴 대통령의 1인 드라마가 러시아 국민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시점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모여 연금 개혁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모스크바의 레바다센터는 3일 여론조사에서 러시아인들의 50% 이상이 연금 지급 수령 인상에 항의해 반대 집회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푸틴 대통령에 대한 찬양과 미화로만 끝날 것 같던 영상에서도 반전은 있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만남을 앞둔 청소년이 ‘알렉세이 나발니 2018’이라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 알렉세이 나발니는 푸틴 대통령의 오랜 정적으로, 대규모 연금 개혁 반대 집회를 주도하려다 전격 체포돼 감옥에 수감돼 있다. 점퍼를 입고 있던 이 학생은 푸틴 대통령이 등장하자 점퍼를 벗으며 티셔츠를 노출시켰다. 그는 가디언에 “이것은 정치적 항의 표시다”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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