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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폴 롭슨과 픽스킬 폭동(9.4)

입력
2018.09.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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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오늘 폴 롭슨(사진)의 픽스킬 공연이 극우단체 회원들의 난동으로 무산됐다. 매카시즘의 전조였다.
1949년 오늘 폴 롭슨(사진)의 픽스킬 공연이 극우단체 회원들의 난동으로 무산됐다. 매카시즘의 전조였다.

픽스킬 폭동(Peekskill Riots)은 1949년 9월 4일 미국 배우 겸 가수 폴 롭슨(Paul Robeson, 1896~1976)의 야외 콘서트장에 ‘KKK’와 ‘American Legion’ 등 극우단체 회원들이 들이닥쳐 난장판을 만든 사건이다. 롭슨이 흑인인 데다 평화ㆍ인권ㆍ노동운동에 열성이던 친(親) 공산주의자인데도 큰 인기를 누린다는 게 그들의 성미를 건드렸다. 예견된 충돌이었지만 경찰은 대비는커녕 사태를 방관했다. 145명이 다쳤고, 피터 시거 등 찬조출연자들의 차량이 부서졌다. 이듬해 깃발을 올린 조지프 매카시의 ‘광적인 빨갱이 사냥’(McCarthyism)의 전조였다.

노예 출신 목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롭슨은 럿거스대 재학 시절 풋볼 스타였고 콜롬비아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였지만, 꿈은 배우가 되는 거였다. 대학서 만난 아내(Eslanda Cardozo Goode, 화학 전공)는 그 꿈의 적극적인 지지자이자 든든한 매니저였다. 아마추어 무대를 전전하다 20년대 초반부터 연극과 뮤지컬로 두각을 나타냈고, 뮤지컬 ‘Show Boat’ 연극 ‘오델로’, 흑인 최초 영화 주연작인 ‘황제 존스’(1933) 등으로 대서양을 넘나드는 대중적 스타로 자리잡았다. 미국의 보수 백인들에게 공산주의자이기까지 한 그는 눈엣가시였다. 픽스킬 공연도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게 된 뉴저지 흑인 청년들(Trenton6)의 구명운동 모금을 위한 거였다. 공연 직전인 6월 그는 소련 후원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참가해 반미연설을 했다는 보도가 나기도 했다.

저 사건 이후 롭슨은 공연장을 찾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 47년 10만 달러에 달하던 연 수입이 52년 무렵에는 6,000달러로 줄었다고 한다. 앞서 50년 미 국무부는 그가 반공 선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여권을 취소, 해외공연도 못하게 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그런 그에게 52년 ‘스탈린 평화상’을 수여했다. 연방대법원이 58년 저 조치를 위헌 판결한 직후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을 중심으로 호주와 유럽 등지에서 주로 활동했다.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는 그를 “예술과 인간의 존엄은 인종과 국적, 피부색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우리 세대 최고의 예술인 중 한 명”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동맥경화와 우울증을 앓다가 63년 은퇴, 칩거하다시피 하며 말년을 보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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