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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총영사관 자수한 밀항 커플, 공소시효 만료 노린 살인범이었다

입력
2018.09.04 04:40
수정
2018.09.04 10:4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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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스러운 밀항자 

 불안한 듯 손발 심하게 떠는 주씨 

 10년 넘는 도피라지만 수상쩍어 

 형사의 촉으로 동거 여성 유씨 조사 

 남편은 살해됐고 그녀는 실종 처리 

 

[저작권 한국일보] 그래픽=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그래픽=강준구 기자

“올겨울은 유난히 춥네.”

야간 당직을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던 대구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오성환 경사가 오한에 잠시 몸을 떨었다. 집에 가서 잠시 눈 좀 붙이고 나면 바로 가족과 함께 따듯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2015년 12월 30일 오전이었다.

사무실 분위기가 영 안 좋았다. 중국 밀항자가 곧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올 테니, 누군가 가서 그를 체포해 데려와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청사에서 공항까지 300㎞가 족히 넘는 거리. 일을 맡으면 이후 신병처리까지 모두 마무리해야 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연말은 당연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 눈치를 살피던 오 경사가 못 이긴 척 손을 들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한국 총영사관에 40대 남녀가 찾아와 10년 넘는 도피생활을 했다며 밀입국 자진신고를 했다는 게 전해진 사건의 내용. 두 사람 중 남성이 이날 공항으로 들어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는 ‘빨리 신병을 처리하고, 퇴근하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4시간 달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사건 당사자 주모(41)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채 뭔가에 쫓기듯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좀 과해 보였다. 손과 발을 계속 떨고 있었다. 밀항을 자진 신고했으니 법정 최고형을 받아도 3년 이상 징역을 살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긴장해서 그렇겠지’ 싶어 몇 마디 툭툭 질문을 던질수록 의문은 의심으로 변해갔다. ‘숨기고 있는 뭔가가 있나’라는 의구심이었다. 수많은 범죄자들을 만나 표정을 살피고, 대화를 하면서 쌓아간 경험에 따른 직감이었다. 주씨는 밀항을 왜 했느냐는 물음에 아예 입을 닫았고, 지금 우리 대통령이 누군지조차 쉽사리 답하지 않았다. “’혹시 간첩 아닌가?’라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어요. 정말 몰라서 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느낌이요. 빨리 집에 가는 건 글렀구나, 불안한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두 남녀신상부터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직감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족관계 등이 나와 있는 제적등본을 뒤적였다. 주씨에겐 별달리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함께 자수를 한 여성에 대한 기록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여성은 49세 유모씨다. 국내에서는 장기 실종에 따라 사망자로 처리가 돼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이 공교로웠다. 19년 전인 1996년 가족이 유씨 실종을 경찰에 신고한 걸로 기록돼 있는데, 그해 남편 A씨도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무엇보다 시신이 발견된 곳이 구마고속도로(현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옆 수로였다. “남편이 사망하기직전이었단 말이죠. 유씨가 그때 실종됐고 실종됐다는 사람이20년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갑자기 중국에서 나타난 겁니다. 참 이상하다 싶었던 거죠. 셋의 관계가 심상치 않구나 감이 온 거죠.”

 #20년 전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유씨 남편 알아볼 수 없게 불에 타 

 사망 수개월 후에야 등산객에 발견 

 당시 기록은 거의 다 폐기됐지만 

 ‘살인 혐의 주씨 수사’ 한줄 단서가 

 

사건을 되짚어 나가보기로 했다. 기록상 A씨 사건은 가까운 대구 달성경찰서에서 맡았다. 뭔가 단서가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갔지만, 사건 기록을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타자기로 기록을 남기던 시기였기에 전산상에는 아무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다. 문서로 된 기록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오래전 폐기 처분된 뒤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그나마 남아 있는 부검 기록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망한 지 6, 7개월 지난 시점에 등산객에 의해 발견됐는데,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됐고 전신90%가 불에 탄 상태였다. 누군가 A씨를 살해한 후 시신을 불태운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시신에서 타인의 DNA 등 단서는 아무것도 추출되지 않았다. ‘미제(미해결 사건)’였다.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A씨 관련 남아 있는 기록을 죄다 모았다. 책상 위에 기록을 쌓아놓고 한 줄씩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찾아낸 하나의 단서. A씨 실종 관련 자료에서 눈이 번쩍 뜨일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딱 한 줄이었다. 어떤 부연도, 첨부된 자료도 없었다. ‘창원경찰서(현 창원중부경찰서)에서 살인 의심자로 소재불명 상태인 주씨를 수사하고 있다’는 문장이 전부였다. 주씨의 등장. 의심스러운3명의 연결고리를 밝혀낼 수는 실타래가 될 것만 같았다.

오 경사는 그 길로 창원중부경찰서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 사정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해당 사건은 기소 중지가 된 상태였으며, 2011년 공소시효 15년이 지나면서 자료도 폐기해버린 상태였다. 주씨가 살인을 했다는 첩보는 입수했지만 정작 주씨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수사는 난항을 겪었고, 결국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다는 허탈한 얘기만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사건을 아는 이들도 죄다 퇴직을 한 뒤였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제 어떡하지?”라는 말만 읊조려야 했다.“그나마 다행인 건 주씨를 구속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밀항자들에게는 영장 발부를 해주지 않는 게 보통인데, 구속이 필요한 이유로 A씨의 살인 가능성을 언급했더니 그걸 법원이 받아준 겁니다.”2주가량 시간은 더 주어진 셈. 그렇지만 뭘 어디부터 다시 해야 할지 난감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도움은 의외의 곳에서 다가왔다. 1997년 8월 MBC 방송국 간판 프로그램 ‘경찰청사람들’이 사건을 소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방송은 주씨가 유씨와 공모해 A씨를 살해하고 시체를 고속도로변에 유기했다며 두 사람을 경찰이 공개수배 중이라고 했다. 주씨가 유씨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웠고, A씨를 살해한 뒤 둘이 도망쳤다는 주장을 폈다. 게다가 방송에서는 그때 경찰이 가지고 있던, 지금은 폐기된 자료들이 상세하게 소개돼 있었다. 방송자료는 공소시효와 무관했고, 무사히 오 경사 손에 건네질 수 있었다.

어렵게 확보한 자료를 들고 당시 첩보를 입수했던 수사관 이모씨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그는 은퇴 후 경남 창녕시에서 숙박업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렴풋하게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정도라며 시큰둥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서 만나 방송을 보여주니 의외로 얘기가 술술 쏟아져 나왔다.

첩보를 제보한 사람은 다름아닌 주씨 누나였다. 당시 파출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주씨로부터 직접 “사람을 죽였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A씨를 살해한 뒤 도피를 하려 했지만 돈이 없었고, 누나와 매형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왜 도망을 가려 하느냐’고 캐묻자 술에 취해 살인 범행을 자세히 털어놨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제보였다.

주씨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자료를 들이밀자, 주씨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특히 누나의 제보 내용이 결정적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을 다시 묻자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죽였습니다.”

 #“내가 죽였다” 순순히 자백 

 전도유망한 양궁선수였던 주씨 

 숙소 인근서 슈퍼 하던 유씨와 밀회 

 포장마차서 남편에게 “헤어져달라” 

 말싸움 끝에 살인 후 야산에 유기 

 

대구에 있는 한 구청에서 양궁선수로 있던 주씨는 달서구에 위치한 숙소 인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유씨와 1996년 7월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마침 유씨는 남편 A씨의 잦은 폭력에 시달리는 등 부부 관계가 좋지 않던 때였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던 조건이었다.

하지만 은밀한 불륜은 오래가지 못했다. 둘 사이를 금새 눈치챈 A씨는 슈퍼마켓을 정리하고 약 15㎞ 떨어진 달성군 현풍면으로 이사를 갔다. 둘 사이를 떼어놓겠다는 의도였건만 주씨와 유씨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8일 급기야 주씨가 A씨를 찾아왔다.“사랑하는 관계니 당신이 이혼하라”는 협박인지 부탁인지 모를 통보를 해댔다.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만난 둘은 말로 몸으로 격렬히 싸웠다. 결국 주씨는 A씨를 인근 공터에서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운 뒤 야산 배수로에 버렸다. 범행을 털어놓은 그는 재개발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살해 장소에서 현장 검증까지 순순히 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죽인 건 맞는데, 공소시효가 끝난 거 아닌가요?” 생각지 못했던 기습이었다. 그때까지 한껏 긴장하며 말까지 더듬던 주씨는 오 경사 앞에서 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기습에 당황하는 오 경사의 모습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이어 자신이 2014년부터 밀항 생활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의 말대로 공소시효가 끝난 2011년 이후에 해외로 나갔다면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밀항을 한 거라면 처벌을 고의로 피해 도망을 갔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시효가 중지되기 때문에 살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그 질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군요.” 해가 지난 1월 6일 유씨도 입국을 했고, 그 역시 주씨와 말을 맞춘 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겨우 수사를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던 오 경사 머리가 지끈해졌다.

 #발목 잡은 공소시효 

 주씨 “공소시효 끝나” 주장했지만 

 도피 시점이 공소시효 만료 前이라 

 처벌 피하려고 고의 도망 인정돼 

 주씨 22년형ㆍ유씨 2년형 선고받아 

반격이 필요했다. 만약 2014년 밀항을 했다면 그 전에는 한국에 살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증거가 있으면 하나라도 내놔 봐라.” 오 경사가 둘을 불러놓고 추궁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둘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도피생활 중이라 일부러 기록을 안 남기려고 했으니 아마 찾아도 없을 겁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실제 범행 직후인 1997년 초 이후에는 금융기록은 물론이거니와 공공요금 사용 내역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이 없더라도 자신들이 18년간 살았던 곳 정도는 밝혀야 했다. “둘은 그런 기본적인 사실에서조차 침묵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 말이 거짓말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은 주씨를 살인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유씨도 살인에 도움을 준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주씨 역시 유씨 도움을 받았다는 부분에 대해 완강하게 부인했다. 결국 밀항단속법 위반만 적용해야 했다.

이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 금세 들통났다. 송치 이후 사건을 받아간 검찰이 추가 수사를 진행하면서다. 주씨와 유씨가 자수하기 직전 주씨 누나가 중국에 입국한 사실이 파악됐다. 대구에 있는 주씨 누나 집을 압수수색했더니 주씨와 유씨가 쓰던 위조여권부터 시작해 둘이 지난 19년간 함께 찍었던 사진까지, 결정적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위조 여권에는 1998년 4월 1일 일본 공항에서 찍힌 입국 도장이 있었다. 밀항 시점은 그들이 말한 2014년이 아니라 1998년이었다.

주씨와 유씨는 A씨를 살해한 뒤 경북 경주시와 전북 군산시를 돌면서 도피생활을 했다고 했다. 이후 주씨가 서울에 올라가 약 1,000만원을 주고 ‘김민수’‘이혜란’이라는 이름으로 위조 여권 2개를 만들었고,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뒤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하이로 도망을 갔다는 게 둘이 털어놓은 도피 행각의 전말이다. 그곳에서 주씨는 일용직을 하고 가족과 지인들 도움을 받으며 근근이 생활을 하다 자진신고를 하고 국내로 들어온 것. 공소시효가 완전히 풀렸으니, 밀입국으로만 처벌을 받겠다는 생각이었다.

2016년 5월 대구지법은 살인, 사체유기, 밀항 등 혐의로 주씨에게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유씨는 끝내 살인공모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여권위조와 밀항 등 혐의만 적용, 징역 2년을 받았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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