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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냐 캐릭터 상품이냐 따질 때 “책이 귀여워” 독자들은 집어들었다

입력
2018.09.01 04:4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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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디즈니 만화 보고 자란 

 20ㆍ30대 여성 타깃으로 제작 

 판형부터 무게까지 세심하게 고려 

 소장 욕구 불러 일으키는 만듦새 

 “누군가의 삶에 큰 역할 한다면 

 책의 가치 충분하지 않을까요” 

서울 가산동 RHK 출판사에서 기획출판팀 최두은 팀장(오른쪽)과 최경민 대리를 만났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를 비롯해 디즈니 캐릭터 에세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배우한 기자
서울 가산동 RHK 출판사에서 기획출판팀 최두은 팀장(오른쪽)과 최경민 대리를 만났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를 비롯해 디즈니 캐릭터 에세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배우한 기자

“우리도 캐릭터 에세이 한번 해 보자!”

올해 출판시장의 최고 화제작이자 문제작,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는 그 한마디에서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RHK출판사 기획출판팀 최두은(43) 팀장. 수요일마다 하는 기획회의에서 아이디어를 던졌다. 지난해 7월쯤이었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2016∙아르테),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2017∙놀)의 대성공에 ‘뭔가 있다’는 감이 왔단다.

캐릭터 선정부터 책 제작까지, 작업은 속도전이었다. 올 3월 책이 나왔다. 책은 정체가 불분명했다. 에세이인데 글보다 그림이 ‘훨씬’ 많았다. 한쪽 걸러 나오는 글은 두세 문장으로 끝났다. 어른 책 같기도, 아이들 책 같기도 했다. 표지에 적힌 원작자는 ‘곰돌이 푸’에, 쪽수는 겨우 160쪽. 지치고 힘든 시대라지만, 책이 이래도 되나…

책은 그 모든 눈총을 흥, 하고 튀기고 대박을 냈다. “나의 길은 나만이 정할 수 있어요”라는 책 속 푸의 말처럼. 책은 올 상반기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올랐다. 교보문고에선 종합 4위,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선 5위를 기록했다. 8월 현재 판매량은 39만권이다. 5월엔 인기 최고의 아이돌그룹 워너원의 포토에세이를 베스트셀러 1위에서 몰아내는 기세를 떨쳤다. 출판사는 한 권의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푸 에세이 2탄을 냈다. 또 통했다.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는 5월 출간돼 14만부 팔렸다. 3탄에선 캐릭터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바꿨다. 7월에 나온 ‘앨리스, 너만의 길을 그려봐’는 한 달 만에 4만부를 찍었다 4, 5탄도 곧 나온다. 다음 캐릭터는 미키 마우스다.

푸의 성공을 이른바 출판계 주류에선 환영하지 않았다. 폄하하거나 시기했다. 말랑말랑한 책만 찾는 독자를 원망하거나.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래 눌러 앉지 못하게 집계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말도 오르내렸다. 푸 에세이는 정말로 그렇게 푸대접받아 마땅한 책인가. 열광하는 독자도 싸잡아 깎아내려야 하나. 시리즈를 기획한 최두은 팀장과 같은 팀의 최경민(30) 대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RHK 출판사 제공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RHK 출판사 제공

캐릭터 에세이 장르의 타깃은 20대와 30대 여성이다. 1990년대 TV에서 방영한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고 자란 세대다. 디즈니는 그들에게 추억과 향수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골랐다. “나는 주말마다 ‘은하철도999’를 챙겨 본 세대다. 세대 차이가 좀 난다(웃음). 디즈니 만화를 책으로 봐서 캐릭터가 낯설진 않다. 40대에도 통하겠다 싶었다. 1탄으로 곰돌이 푸를 택한 건 행복을 말하는 캐릭터, 안티가 별로 없는 캐릭터여서다.”(최 팀장)

원래 기획은 빨강머리 앤, 보노보노 에세이처럼 한국 작가에게 캐릭터를 모티프 삼은 산문을 쓰게 하는 거였다. 캐릭터 사용 계약을 하려고 디즈니사에 접촉했다. “일본에 비슷한 책이 나와 있으니 참고해 보라”는 답을 들었다. 일본 에세이의 메시지는 썩 괜찮았다. 어조가 문제였다. 독자를 가르치려고 했다. 정색한 자기계발서에 가까웠다. 국내 에세이 독자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일본 책의 콘셉트는 살리되, 책을 다시 만드는 수준으로 다듬기로 했다. 대학 문예창작과 출신인 최 대리가 번역본을 윤문했다. 사실상 새로 쓰기였다. 최 대리의 출판사 편집자 경력은 겨우 3년. 최 대리의 젊은 감각을 믿었다. “교조적인 느낌을 전부 뺐다. 힐링되는 글,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는 글, 깨달음을 강요하지 않는 글로 바꿨다.”(최 대리) 책에서 ‘지식’보다 ‘위로’를 구하는 요즘 트렌드에 맞춘 전략이었다. 그래서 책은 저자 없는 책, 그렇다고 번역서도 아닌 책이 됐다. 원작자가 곰돌이 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사연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상식이나 지금까지 이어져온 관습대로 사는 것이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삶이 정말 만족스러울까요? 그 삶에 ‘내’가 있을까요?”(‘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편하기는 하지만’ 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어떤 문제가 일어나든 자신을 탓하며 다른 사람의 괴로움까지 짊어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괴로움을 크게 만들 뿐입니다.”(‘혼자 괴로움을 끌어안지 마세요’ 편) “행복은 우리 눈앞에 있지만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행복은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우리 자신만이 찾아낼 수 있죠.”(‘행복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요’ 편)

과장하면 ‘착하게 살자’와 다름 없는 문장들이다. 어느 대목에서 감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책의 성공을 흘겨 보는 이가 많은 이유다. 그런데, 문장이 책의 전부일까. 그렇다면, 문장과 내용이 훌륭한 책들이 숱하게 사장되는 건 왜일까. 팔리는 책과 아닌 책을 가르는 기준은 뭘까. 최 팀장과 팀원들은 책의 ‘만듦새’에 주목했다. 일단 집어 들어 펴 보고 싶은 책, 여성 독자들이 핸드백에 넣어 여기저기 들고 다니기 편한 책, 선물하거나 소장하기에 그럴듯한 책, SNS 용 사진발을 잘 받는 책을 만들기로 했다. 장정, 제본 방식, 판형, 속지 두께, 글씨체, 색감부터 책 무게까지 모든 걸 그야말로 ‘기획’했다. 책 크기를 5㎜ 단위로 늘렸다 줄였다 해 봤다. 표지 디자인은 수도 없이 바꿨다. “팀이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 만들어 낸 책이다. 시험 제작해 보면서 책이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왔다. 그래도 이 정도 대박이 날 줄은 몰랐다. 2000년 이후 이 정도 판매량은 하늘이 내려야 가능한 거다(웃음). 직원들이 뭘 한다고 하면 믿고 밀어 주는 회사 분위기의 역할도 컸다.”(최 팀장)

'앨리스, 너만의 길을 그려봐'. RHK 출판사 제공
'앨리스, 너만의 길을 그려봐'. RHK 출판사 제공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책은 여전히 인기였다. 책을 들춰 보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책이 너무 귀엽고 예뻐요”, “시리즈 전부 다 모으고 싶어요”, “어릴 때 생각 나요”, “사진 찍으면 잘 나와요…” 책은 캐릭터 상품처럼 소비되고 있었다. 그 현상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최 팀장도, 최 대리도 알고 있다.

‘출판 밥’ 먹은 지 20년 된 최 팀장은 원래 문학 편집자였다. 두꺼운 경제경영서도 만들었다.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의 베스트셀러가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뭐든 되는 걸 자유롭게 한다’는 취지로 만든 기획출판팀을 맡은 건 지난해 1월부터다. 최 팀장의 이야기.

“편집자 10년 차쯤 됐을 때 책이 뭔지를 깊이 고민했다. 당시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에서 내리 10번 떨어진 선배가 있었다. 차의 메커니즘을 책으로 공부하고 나서 바로 합격했다. 당구, 장기도 책으로 배웠다고 했다. 바로 그거다, 했다. ‘독자가 느끼는 책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답을 만났다. 누군가의 삶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면 그것만으로 책의 가치가 충분한 것 아닐까.” 생각이 많았는지, 그의 논리는 단단했다. “시대가 바뀌었다. 한 가지 가치에 책을 묶어 둘 수 없다. 신성하고 진지한 책만큼 취향, 재미, 라이프스타일을 가볍고 쉽게 다루는 책도 필요하다. 책의 역할이 저마다 다른 거다. 책은 나에게 여전히 무서운 존재다. 누군가에겐 시시한 자기계발서로 보일지 몰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책을 만든다.”

최 대리의 이야기. “마케터로 입사해 2년 만에 편집자로 전직했다. 그간 실용서를 주로 만들었다. 무거운 책 만드는 분들에게 처음엔 기가 죽었다. 내가 잘 하고 좋아하는 것부터 해 보기로 했다. 책에 뭘 담아야 한다는 정답은 없다고 본다. ‘푸 책을 읽고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라 행복해졌다’는 리뷰를 남기는 독자가 많다. 우리 책이 나름의 할 일을 한 게 아닐까.“

곰돌이 푸 책이 좋은 책인지에 대한 의견은 아마도 영원히 갈릴 것이다. 책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책이란, 책다운 책이란 무엇인가. 그리하여, 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책 속 푸의 말 중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소중히 여겨요”를 고를 것인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과거의 나를 버리세요”를 택할 것인가.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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