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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 칼럼] 진보 정권이 위기에 빠지는 이유

입력
2018.08.30 11:09
수정
2018.08.30 19:39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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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칼럼 제목을 진보 정권만이 위기에 빠진다는 의미로 곡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1987년 이후만 보더라도 민자당의 김영삼 정권은 집권 말기에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혹독한 IMF관리체제를 불러왔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통령도 국정농단과 권력형 부정부패를 저질러 촛불집회를 거쳐 탄핵까지 당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모든 정권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칼럼 제목은 진보 정권이 위기에 빠지는 ‘고유한’ 이유에 주목하겠다는 뜻으로, ‘보수 정권이 위기에 빠지는 이유’와 대비시켜 이해하면 된다.

진보 정권은 일반적으로 서민과 약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꾀함으로써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모색한다. 이것이 진보 정권이 보수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에 대해 평등을, 효율과 성장에 대해 공평과 분배를 강조하는 이유다. 하지만 지지 세력의 희망과 달리 진보 정권은 빈번히 위기에 빠지거나 실패한다. 진보정치의 옹호자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진보 정권으로 통하는 문재인 정권도 위기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집권 1년까지 고공 행진했던 지지율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기저효과와 문 대통령의 소통적 리더십,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완화에 대한 기대감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불과 몇 달 사이에 70%에 근접하는 지지율에서 50% 중반을 밑도는 지지율로 급전직하 한 현상은 문재인 정권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징후로 보기에 충분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진보 정권이 위기에 빠지는 이유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보주의자들의 특유한 정치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의식은 정치를 이해하는 특수한 방식이나 태도로서 집권 세력의 정치스타일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통치의 성패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근대적인 진보정치는 17ㆍ8세기 유럽에서 데카르트와 계몽주의자들이 확립한 합리주의 사조의 세례를 받으며 형성됐다.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전형적인’ 진보주의자들은 정치를 (경험이나 전통보다는) 이성에 의해 구성된 합리적 원칙이나 비전을 실현해나가는 기술, 곧 사회공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제시한 정치적 비전(=이데올로기)은 주로 사회정치적 약자들이나 다수 서민들의 열망을 반영하기 때문에 새로운 체제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성적 계획의 완벽성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는 합리주의자들은 경험적 현실의 복잡성과 관성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현실감과 신중함이 부족하다. 옳고 그름과 삶의 목적을 판단하는 인간의 지적ㆍ도덕적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복잡다단한 현실을 몇 가지 합리적인 추상적 원칙들로 손쉽게 개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낙관적 합리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진보적인 정치의식은 다수가 혹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안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기성체제가 지닌 강력한 관성과 반개혁 세력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과 방법을 모색하는 데는 심각한 취약성을 드러낸다. (보수적 정치의식은 상반되는 장점과 단점을 지닌다)

진보적인 정치의식의 이런 특성 때문에 진보 세력은 특히 국정 운영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사회에는 여전히 두터운 보수층이 건재하고 있다. 또 모든 사회구조나 체제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강력한 관성을 갖고 있다. 이런 힘들은 진보주의자들의 개혁정치를 저지하는 반동의 힘으로 작용한다. 이런 엄중하고 당혹스러운 현실 앞에서 낙관적 합리주의를 견지하는 진보 정권은 현실적인 타개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다.

선거민주주의는 진보적 개혁 정치의 근간을 뒤흔드는 추가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지구화된 경제체제에 편입된 경제구조는 진보 정권이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을 때 쉽게 멈추거나 재편되지 않고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반발한다. 이 때 발생하는 일시적인 혼란과 대중적 비난에 당황한 진보 정권은 이내 다가올 총선과 대선의 패배 가능성을 의식하며 개혁을 대폭 후퇴시킴으로써 중도보수 세력의 이탈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중도보수 세력은 그런 정책적 후퇴를 보수 정책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그리하여 진보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근거로 받아들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어정쩡한 태도가 전통적인 지지층마저 돌아서게 만든다는 점이다.

진보 정권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진보적인 정치의식의 장점은 최대한 활용하고 그 단점은 보완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정책의 당위성을 ‘정교한 논리로 끈질기게’ 설명함으로써 지지층 이탈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개혁의 수위를 새로 정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최소한의 실질적인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집권 2기에 들어선 문재인 정권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하고 개혁의 동력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을지 지켜 볼 일이다.

김비환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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