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평범한 회사원을 ‘OO녀’로 몰고간 지라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을 ‘OO녀’로 몰고간 지라시

입력
2018.09.03 04:40
수정
2018.09.03 06:35
1면
0 0

 #대기업 사내서 돌다 타사 퍼져 

 ‘남자직원 5명과 잠자리’ 허위사실 

 개인정보 털려 전화ㆍ메시지 폭탄 

 

 #피해자 “내가 죽어야 끝나는 고통” 

 “저 사람도 지라시 봤을까” 일상 파괴 

 정신과 병원 가도 구체적 진술 못해 

 회사동료 조사 부담에 고소도 쉽지않아 

 

 #유포자 “재미로 뿌렸는데…” 

 우월감ㆍ과시욕에 계속 유포시켜 

 작년 사이버 명예훼손 입건 1만3348건 

 피해자 고소 땐 단순 복사ㆍ전달도 처벌 

사이버 명예훼손 모욕 혐의 입건수_김경진기자
사이버 명예훼손 모욕 혐의 입건수_김경진기자

한 달하고도 보름 전, 국내 굴지 유통 대기업 사원 A(25)씨에 대한 ‘지라시(ちらしㆍ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담긴 쪽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지라시는 곧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옮겨갔고, 소문은 금세 ‘사실’로 굳어졌다.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소문을 퍼뜨렸다. ‘이런 거 봤어?’ ‘무슨 일 나겠어. 심심풀이로 돌려보는 거지.’ 재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OO녀’, 직장명이 꼬리표처럼 붙은 A씨는 녹초가 됐다. 직접 가해진 물리적인 폭력은 하나 없지만, 지옥 같은 하루하루에 신음하고 있다. 공인도 유명인도 아닌 일반 회사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의 삶이 지라시 하나로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2일 본보가 A씨를 어렵게 만났다. 그는 “죽어야 끝날 거 같은 고통”이라고 했다.

 아침부터 걸려온 수상한 전화들 

7월 19일 오전. A씨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네, OOO입니다.” 전화를 받고 이름까지 밝혔지만 상대방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한 통이 아니었다. 오전에만 6, 7통, 모두 모르는 번호고, 받으면 바로 끊는 전화였다. 이상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오후 2시쯤, 친한 회사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방금 동기 카카오톡 단체방에 ‘이런 것’이 올라왔다”는 말을 전했다. 이어 ‘이런 것’의 정체가 수신됐다. A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지라시다.

충격이었다. 지라시는 A씨가 같은 회사 남자 직원 5명과 잠자리를 가졌다고 했다. 그 남성들에 대한 평가를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지인들과 공유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남성들 중에는 ‘신혼여행 다녀오는 길에 A씨에게 선물할 가방을 사오고, 현재 부인이 임신한’ 유부남도 있다는 부연이 따랐다.

이어 A씨 신상이 ‘털렸다.’ 지라시와 함께 회사 인사정보가 돌았다. 사내 직원만 접속할 수 있는 ‘인사정보시스템’ 화면을 그대로 찍은 사진이었다. 인사정보에는 사진, 소속 부서, 부서 직통 번호 그리고 휴대폰 번호가 몽땅 담겨 있었다.

후배 연락을 받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용 자체가 터무니없고, 모두 사실무근이라 그랬다. 지라시에 나온 남자 직원들은 “업무 차 한 번 정도 만나거나 신입사원 교육 받을 때 스치듯 만난 사이”에 불과했다. 당연히 “휴대폰 번호가 저장돼 있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내가 떳떳하니 괜찮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저 회사 직원 몇몇끼리 돌려보고 말 줄 알았죠.” 오산이었다.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렸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계속 이어졌다. ‘거절’ 버튼을 누르고 나면, 바로 새로운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은 계속 울려댔다. ‘안녕’ ‘OOO씨 맞나요?’ 같은 단순 메시지와 ‘회사 사람만 평가해주나. 왜 나는 안 되나’ 등 성희롱 메시지가 휴대폰에 순식간에 쌓여갔다. ‘너는 OO대학교를 나왔고, OO학과를 다녔고’라며 과거를 읊는 메시지도 있었다. 그렇다고 휴대폰을 끌 수도 없는 노릇. 업무를 하기 위해선 휴대폰이 필요했다.

다음날 아침, 일은 점점 커져갔다. 한 선배가 다급하게 전화했다. “심각해진 거 같다”라며 “다른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이 아침부터 너에 대해 물어보더라”고 했다. 밤 사이 지라시가 회사 밖으로 널리 퍼진 것이다. 실제 휴대폰에는 밤새 부재중 전화가 수백 통이나 와있었다. ‘국제번호’로 걸려온 전화도 있었다.

A씨가 그간 사용하던 SNS도 털렸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계정 주인이 올린 게시물을 보기 위한 권한을 신청)한 사람이 하루 밤에만 400~500명 늘어났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 캡처된 채 유통되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 이후 거의 사용하지 않은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던 고교, 대학교 시절 사진도 함께였다.

 “병원에서 내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일상생활은 불가능해졌다. A씨는 “길을 걷다가 누가 쳐다보면 ‘저 사람이 지라시를 봤을까’ ‘나를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휩싸여 숨고 싶다”고 털어놨다. 일을 하면서도 다른 부서나 거래처에 전화를 해 “OOO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 부끄러웠다”고 했다.

마음을 고쳐먹고, 아무 일 없듯 생활하려 해도 사람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사내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데, 같은 회사 직원이 이 장면을 몰래 찍어 ‘OOO은 뻔뻔하게 밥도 잘 먹는다’는 내용과 함께 사진을 온라인에 뿌려댔다. A씨는 “이제 사람들 앞에서 밥도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됐다”고 흐느꼈다.

A씨 지라시 유포 사건 일지_김경진기자
A씨 지라시 유포 사건 일지_김경진기자

잠깐 동안, 그는 ‘OOO 동영상’ ‘OO녀 동영상’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한 커플의 성관계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퍼졌는데, 온라인에서는 아예 대놓고 ‘OO녀 동영상 어디서 볼 수 있나요?’ 같은 문의 글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은 A씨가 아니었다. 사람이 무서웠다.

더는 버틸 수 없어 정신과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진료 접수조차 쉽지 않았다. “병원 직원들에게 내 이름을 말하면 ‘지라시 돌았던 OOO가 우리 병원 왔다’고 퍼뜨릴까 봐, 이름도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고 했다. 어렵게 접수를 하고도 같은 이유로 의사에게 사건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지 못했다. 겨우 “회사에서 구설에 올라 힘들다” 정도로 설명했다. 몸도 망가졌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방광염이 동시에 오고, 그 짧은 시간에 살이 6㎏이나 빠져 있었다.

인터넷에 ‘찌라시’라고만 검색해도 A씨가 다니는 ‘회사명’과 ‘OO(회사명) 여직원’ 같은 연관 검색어가 줄줄이 나왔다.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 삭제 요청을 해도 연관 검색어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라시 내용이 진짜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끝을 보려고 하는 거 같았어요. 내가 죽어야지 이게 끝나겠구나.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람들은 계속 얘기하겠구나. 죽어야지 입을 닫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 무서움을 모르겠더라고요. 지라시를 만들고 공유하는 게 얼마나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모는 건지 모르는 거죠.”

 유포자 그리고 방관자 

사실 지라시에 고통 받은 일반인은 A씨만 있는 게 아니다. 1년 전 한 증권사에서 30대 남녀가 불륜을 저질렀다며 사내 인사정보와 함께 지라시가 퍼졌지만,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로 3년 차 직장인이자 유부남인 B(36)씨는 자신이 ‘여자 인턴사원’만 골라 선물 공세를 펼친다는 허위 사실이 담긴 지라시에 최근 곤욕을 치렀다. 경찰청에 따르면 이런 방식을 포함해 지난해 온라인 상에서 허위 사실을 유포해 타인을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해 경찰에 입건된 경우만 1만3,348건에 달한다.

우리 주변에 쉽게 지라시가 도는 건 무엇보다 수많은 유포자가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그저 ‘재미’로 지인들에게 전달하곤 해서다. A씨의 친한 지인들이 지라시가 어떻게 퍼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라시를 전달한 사람에게 ‘누구한테 받았냐’고 메시지로 묻자, ‘헐 ㅋㅋ 말 못해. 나 잡혀 들어가는 거 아니지ㅋㅋㅋㅋ’ 같은 장난스런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고 한다. 지라시를 카카오톡 단체방에 올린 적 있다는 회사원 김모(32)씨는 “내용이 재미있어서 주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과시욕에 빠진 유포자, 비뚤어진 욕구를 충족하려는 사람, 내 알 바 아니라는 방관자들이 상황을 악화시킨다. 지인 부탁에 지라시를 유포한 대학생 장모(27)씨는 “구하는 사람에게 지라시를 주면서 솔직히 우쭐했다”라며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우월감이 지라시를 계속 유포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회사원 박모(34)씨는 “단체방에 지라시들이 올라오고 퍼져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 얘기고 며칠 돌다 말 걸 알기에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회사원 정진수(35)씨는 “지라시 공유하지 말라고 단체방에서 얘기했다가 ‘뭘 그리 심각하게 말하냐’ ‘우리가 안 해도 누군가 한다’는 차가운 반응만 받았다”며 “죄의식이 조금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 아니면 고소해야지” 

A씨는 “지라시 내용이 사실이 아니면 왜 고소를 안 해. 떳떳하면 고소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듣는 게 고통스럽다. 사실 변호사와 함께 지라시 최초 생산자와 유포자들을 잡아달라는 고소를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다니는 회사 직원 상당수가 조사를 받아야 할 판이다. “당장 먹고 살려면 회사를 다녀야 하는데 회사를 뒤집어놓는 선택을 쉽게 할 수 없다”고 힘겹게 말했다. 그나마 A씨 인사정보를 캡처해 유포한 직원은 사내 조사를 통해 적발돼 최근 퇴직 처리가 됐다.

경찰 관계자는 “카카오톡 대화의 경우 서버에 최대 3일간 저장되고 삭제되지만 이후에 고소해도 최초 생산자와 단순 유포자 검거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몹쓸 그 사람을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울러 경찰은 “최초 생산자와 최초 유포자만 처벌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며 “피해자가 유포 경로에 있는 사람을 특정해 고소하면 단순 복사 및 전달만 했더라도 처벌을 피할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재미로 뿌린 지라시 때문에 누구든지 범법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