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애가 죽었다고 하니 정신이 온전하겠어요. 몸 따로, 마음 따로. 행동이 잘 안 됐었죠.”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는 이따금 웃었다. “이제 좀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딸의 장례식을 9년 만에 치르고 돌아오는 길. ‘어쩌다 9년이나 걸렸느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담담하게 답했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며 잇따라 목숨을 끊은 단역배우 자매의 장례식이 28일 서울 중구 국립의료원에서 치러졌다. 자매가 세상을 떠난 지 9년 만이다. 자매의 어머니 장연록씨는 29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딸들을) 화장한 지는 좀 됐다. 이번 장례식은 형식만 갖춘 것”이라며 “(그래도) 9년 만에 장례식을 치르니 마음이 편하다. 흡족하다”고 말했다.
자매의 비극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7월, 언니 A씨는 동생 B씨 소개로 단역배우 일을 하다가 경남 하동군의 한 드라마 촬영장에서 연예기획사 보조반장 C씨로부터 성추행 당했다. 성추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같은 해 11월까지 C씨를 비롯해 총 4명이 A씨를 성폭행 했고, 8명이 성추행 했다. ‘보조반장’이란 권력을 등에 업은 C씨는 A씨에게 “(성폭행 사실을) 주위에 알려 사회 생활을 못 하게 만들겠다”, “동생을 팔고, 어머니를 죽이겠다”는 등 갖은 협박을 일삼았다.
A씨는 그 무렵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집에 오면 흉기를 들고 “동생과 어머니를 죽이겠다”며 협박하거나, 물건을 집어 던졌다. A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참담한 진실을 털어놨다. 어머니 장씨는 A씨가 지목한 성폭행 가해자 12명을 고발했다. 그러나 장씨에 따르면, 이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장씨는 경찰의 ‘2차 가해’를 주장했다. 수사를 이유로 A씨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장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경찰은 큰딸에게 가해자의 성기 모양, 크기를 그려 오라고 하거나 가해자와 함께 낄낄대며 웃기까지 했다”며 “스트레스를 받은 딸이 차가 달리는 도로에 뛰어든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공권력이 피해자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한 장씨는 1년 7개월 만에 고소를 취하했다. 하지만 성폭행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A씨는 사건 5년 뒤인 2009년 8월 28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동생 B씨도 6일 뒤 언니의 뒤를 따랐다.
지난 3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해당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하는 글이 답변 기준인 20만 명을 돌파하면서 경찰청은 특별수사팀을 꾸려 사건을 원점부터 다시 살피고 있다. 그러나 14년이란 시간이 흘러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밝혀낼 수 있을지, 밝힌다 해도 가해자들이 법의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장씨는 “(예전엔) 딸들 묘지만 봐도 눈물이 나고 이랬다. 그런데 (오늘은) 편하게 얘기도 나오더라”라며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비가 내렸다. 하늘도 같이 슬퍼하는 것 같았다”며 말끝을 흐렸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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