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를 틀어쥐고 있는 미국의 제재 전선에 균열이 생길 조짐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8일(현지시간) “독일이 터키에 대한 긴급금융지원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초기 단계의 검토’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모두 터키의 경제위기를 우려하면서도 아무도 총대를 메지 않는 시점에서 주목할만한 움직임이다.
독일 고위관료는 “우리에겐 선택지가 별로 없다”며 “터키를 안정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강조했다. 오라프 숄츠 독일 재무장관도 최근 베라트 알바이라크 터키 재무장관과 만나 금융지원 방식에 대해 논의했다고 베를린의 다른 고위관료가 전했다. 특히 독일과 터키는 내달 28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어 회담 의제를 사전 조율하는 과정에서 금융지원은 최우선 의제로 다뤄질 공산이 크다.
그간 터키는 EU에서 경제지원을 받는 대신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중동 난민을 차단하는 보루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터키가 흔들리면 유럽의 관문이 뚫려 EU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 수 있다. 독일은 2015년 이후 20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난민 문제에 진저리를 치는 EU가 끝없이 추락하는 터키 경제를 방관할 수 없는 이유다. 터키를 겨냥한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대해 “완전히 몰상식적이고 무지한 정책”이라고 일갈할 정도로 EU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다만 EU가 터키를 수렁에서 끌어낼 정도로 단단한 동아줄을 내릴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 가장 확실한 해법이지만, 터키를 제재하는 미국이 IMF를 주도하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카드다. IMF가 반대급부로 내걸 가혹한 긴축재정을 터키 정부가 수용할 리도 만무하다. 대신 유럽투자은행(EIB),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등 EU의 금융기구를 동원할 수 있지만 회원국 간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독일을 비롯한 몇몇 국가가 개별적으로 실탄을 쏟아 부어 되돌리기엔 터키의 위기수위는 이미 선을 넘었다. 정치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지난주 여론조사에서 독일 국민의 72%는 터키에 대한 금융지원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이 독일의 방위비분담이 너무 적고 무역흑자는 많다며 사사건건 트집잡는 상황에서 독일이 호기롭게 반기를 들고 미국과 등을 돌릴지 의문이다.
따라서 당분간 상황을 주시하며 물밑 타진에 치중할 것으로 보인다. EU의 한 고위 외교관은 “터키가 파산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며 “어떤 형태로든 지원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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