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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자연의 정원사, 지렁이

입력
2018.08.2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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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폭염과 태풍이 지나간 뒤 농부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텃밭 농사를 짓는 나도 마찬가지. 가뭄으로 땅이 너무 메말라 파종을 미뤄온 밭에 서둘러 김장배추를 심고 무씨를 뿌려야 하기 때문이다. 촉촉하게 젖은 땅에 무씨를 뿌리려고 호미를 넣었는데, 부드러운 흙과 함께 지렁이들이 걸려 나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곁에서 일을 거들던 아내가 반가워 소리친다. “와, 지렁이밭이 됐네요.” 아내의 표현이 우스워 킬킬대다가 내가 대꾸한다. “누군가는 지렁이를 ‘자연의 정원사’라 부르던데?” “멋진 호명이네요, 호미에 찍히지 않게 조심해야겠어요.”

아내도 많이 변했다. 10여년 전 귀농하여 자연의 먹거리에 눈뜨고, 잡초로 요리를 하고, 풀과 농작물을 함께 키우는 자연농을 하면서 그 징그러운 지렁이를 보고 흔감하고 있으니. 무씨를 뿌리는 동안 우리는 혹 지렁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파종 시간은 더뎌졌다. 전에 살던 이가 농약과 화학비료를 쏟아부어 농사짓던 땅. 지렁이나 땅강아지 같은 생물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볼 수 없던 황폐해진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우린 얼마나 애를 썼던가. 풀을 베어다 넣고, 아침마다 요강의 오줌을 쏟아붓고,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두었다 넣기를 10여년. 마침내 지렁이들이 우글우글 붐비는 옥토가 된 것.

땅을 살리는 일에 관심이 많은 나는 얼마 전 흥미로운 책을 읽었다. 데이비드 몽고메리의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이 책에서 저자는 진화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이 생애 말년에 지렁이를 연구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종의 기원’이란 책으로 유명해진 그의 마지막 저술은 남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일 수도 있는 지렁이 연구였다고. 그는 도대체 지렁이에게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지렁이는 오물이나 낙엽 같은 유기물을 삼켜 토양을 이롭게 하는 무기물을 배출한다. 그렇게 지렁이가 배출한 무기물을 ‘분변토’라고 하는데, 이 분변토가 박토를 옥토로 바꾸어준다는 것. 다윈은 직접 거실에 단지들을 갖다 놓고 지렁이를 키우는 실험을 통해 “시골의 모든 옥토는 지렁이의 창자를 여러 번 거쳐 온 것이며, 앞으로도 다시 여러 번 거칠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도 했고, 지렁이가 오랜 세월 동안 땅의 모양새를 바꿔 놓는 주요한 지질학적 요인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세계적인 생물학자가 지렁이 연구에 몰두하는 걸 보고 노인네가 망령이 들었다고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다윈은 지렁이를 ‘자연의 정원사‘라고 칭송하며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쟁기는 사람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소중한 것에 속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이 지구에 살기 훨씬 오래전부터 지렁이들이 땅을 규칙적으로 쟁기질해 왔고 지금도 변함없이 땅을 갈고 있다. 세계사에서 이 하등동물에 버금갈 만한 중요한 일을 한 동물들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다.”

2억 년 전 지구상에 나타나 오랜 세월 흙을 부드럽고 기름지게 만든 역할을 하는 지렁이. “흙 속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는, 사실상 하나의 트랙터이자 비료공장이며, 다목적 댐”(반다나 시바)인 지렁이. 급격한 기후변화로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곧 다가올 종말을 예견하는 세상. 내일 종말이 와도 누구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는데, 나는 지렁이를 키우리라. 종말이 내일 온다 해도 생명을 가진 존재는 기름진 땅을 통해서만 먹거리를 얻을 수 있으니까. 한자로 토룡(土龍)이라고도 부르는 지렁이. 꿈틀꿈틀, 사람 눈에는 느려 보이지만 땅속을 날아다니는 토룡. 땅을 살리는 토룡이 없으면 지구생명의 미래는 없다. 인류의 건강한 먹거리,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는 토룡과 같은 생물들과의 공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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