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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식민ㆍ분단 넘어 여성해방” 한국 페미니즘 길을 열다

입력
2018.08.27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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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 80년대 여성운동 대모 

 분단 현실ㆍ가부장제ㆍ산업화 등 

 여성이 처한 사회적 억압에 맞서 

 이론적ㆍ실천적 계몽에 앞장 서 

 

 #‘분단 시대 사회학’ 개척 업적 

 분단이 여성ㆍ가족ㆍ사회구조 등에 

 미치는 영향 분석하고 이론 지평 

 통일에 대한 실천 가능성 모색 

 

 #민주주의 핵심 성평등 위해선 

 남녀차별 해소 정책 강화하고 

 여성 전문인력 적극 활용하며 

 가부장적 조직^문화 뿌리 뽑아야 

 

한국 여성 이론, 그리고 여성 운동의 대모라 불리는 이효재 선생. 여성이론의 소개와 도입 뿐 아니라 한국의 여성학 이론 정립에도 노력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여성 이론, 그리고 여성 운동의 대모라 불리는 이효재 선생. 여성이론의 소개와 도입 뿐 아니라 한국의 여성학 이론 정립에도 노력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구 현대사상사에서 가장 주목할 현상의 하나는 페미니즘의 도전이다. 페미니즘이란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에 주목해 여성의 권리와 해방을 모색한 이론 및 실천을 말한다. 페미니즘의 기원은 모더니티 초기까지 올라간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는 고전적인 연구다. 서구 페미니즘은 자유주의ㆍ사회주의ㆍ마르크스주의ㆍ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더하여 포스트모던ㆍ탈식민주의ㆍ에코 페미니즘 등 다양한 담론과 실천으로 분화되고 발전해 왔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여성문제에 접근하는 데는 성(sex)과 젠더(gender)의 구분이 중요하다. 성이 남성과 여성 간의 해부학적 차이를 말한다면, 젠더는 양성 간에 존재하는 사회ㆍ문화적 차이를 의미한다. 주목할 것은 이 젠더가 교육과 사회화를 통한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 간의 사회적 불평등은 타고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성평등과 이를 위한 여성운동은 민주주의의 중대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운동과 더불어 담론으로서의 여성해방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지식인으로 나는 이효재를 주목하고 싶다. 2003년 교수신문이 펴낸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 현대 한국의 자생이론 20’에서 이효재는 여성학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꼽혔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면, 1979년 대학에 입학한 내게 이효재는 조형, 조한혜정과 함께 여성문제의 중요성을 깨우쳐준 여성학자이자 사회학자였다.

 여성과 분단의 선구적 연구 

이효재는 1924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미국 앨라배마주립대, 컬럼비아대,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다음, 이화여대 등에서 사회학과 여성학을 가르쳤다. 그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여성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해온 동시에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효재의 학문적 업적을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사회학자 김진균은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한 바 있다. 김진균에 따르면, 이효재는 우리 학계에 처음으로 여성이라는 변수를 도입했고, 여성학에서도 역사적 이해를 중시해 토종이론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분단 시대의 사회학을 개척했다. 이효재의 학문 세계를 돌아볼 때 공감할 수 있는 견해다.


여성문제, 여성운동, 여성해방을 다룬 이효재의 주목할 저작들로는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1979), ‘분단 시대의 사회학’(1985),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1989)을 들 수 있다.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은 1980년대에 여성문제와 여성운동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겐 필독서였다. 이효재는 이 책에서 베티 프리단, 줄리엣 미첼 등의 서구 페미니즘을 위시해 제3세계 여성문제와 한국 여성운동에 관한 글과 논문을 엮어 소개한다. 산업화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던 당시 여성해방의 사회적 계몽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 저작이다.

‘분단 시대의 사회학’ 또한 문제적인 저작이다. 이효재는 여성문제는 물론 분단 현실을 선구적으로 분석한 사회학자였다. 이 책에서 그는 “몰가치적인 실증주의를 과학적 사회학과 동일시하려는 그 시대적 풍조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변화를 가족의 민주화나 여권의 평등화를 전제한 가치지향적 입장에서 가족과 여성의 연구를 일관해 왔다”고 자신의 학문을 회고한 다음, “분단으로 인한 피해를 가족과 여성문제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분단국가를 유지하려는 체제로서 형성된 사회구조적 성격의 차원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효재의 분단 시대 사회학은 역사학자 강만길의 분단 시대 역사학과 함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모색한 실천적 학문이다. 분단이 가족과 여성, 자아정체성과 사회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함으로써 이효재는 분단에 대한 이론적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통일에 대한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볼 때 개척자적인 연구였던 셈이다.

 성평등을 향한 여성운동 

‘한국의 여성운동’은 이효재의 대표 저작이다. 우리 여성학을 다룬 글인 ‘한국 여성학과 여성운동’을 더하여 1996년 증보판이 나왔다. 이 책은 근대 여성 민족운동부터 분단 시대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여성운동이 걸어온 과거와 나아갈 미래에 대한 이효재의 분석 및 전망을 결산한 저작이다.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역사에 대해 이효재는 “조선조 말 망국의 위기에서 시작한 여성개화는 구국운동 참여로 나타났고, 식민지 시대를 통해 여성해방을 민족해방과 연결해서 인식했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민주화 시대가 막 열린 1980년대 후반의 시점에서 “여성노동운동과 근우회의 전통 위에서 성장해온 한국 여성운동의 성격”을 다시 주목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효재의 연구가 갖는 의의는 우리 사회 여성이 처한 사회적 억압에 대한 이론적ㆍ실천적 계몽에 있다. 식민 지배, 분단 현실, 가부장적 사회, 자본주의 산업화는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제함으로써 여성을 다중적 억압 아래 놓이게 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이효재는 가족과 사회의 민주화, 무엇보다 성평등과 여성해방을 향한 여성운동의 적극적 역할을 부각시킨다.

이효재가 주도적으로 열어온 페미니즘은 198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여성학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됐다. 이들은 ‘여성사연구회’, ‘또 하나의 문화’ 등을 창립해 페미니즘 담론을 펼치고, 이를 여성운동에 접목시켜 왔다.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여성운동은 노동운동, 환경운동과 함께 사회운동의 한 축을 이뤄왔다.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그의 시대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지식인들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여성학의 경우 1970~80년대는 ‘이효재 시대’였다.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유독 두드러진 우리 사회에서 학문과 운동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며 성평등과 여성해방의 중요성을 일깨워온 이효재는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대모’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는 사상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운동의 미래 

민주화 시대를 돌아볼 때, 우리 사회 여성의 지위는 호주제 폐지, 전문직의 여성 비중 증가에서 볼 수 있듯 더디지만 꾸준히 향상돼 왔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서 여성은 여전히 크게 소외되고 배제되고 있다. 성평등은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가기 위한 중요한 조건의 하나다.

1954년 미국에서 공부하던 이효재(맨 오른쪽) 선생이 아버지, 자매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 아버지 이약신 목사는 광복 이후 사회복지사업에 투신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4년 미국에서 공부하던 이효재(맨 오른쪽) 선생이 아버지, 자매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 아버지 이약신 목사는 광복 이후 사회복지사업에 투신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0월 청와대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 내외를 만난 이효재 선생.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0월 청와대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 내외를 만난 이효재 선생.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 사회에서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남녀 차별 해소를 위한 고용정책이 강화돼야 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저조하다. 또 상당수 여성 노동자는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는 여성들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이를 위해 보육 및 노인 부양 등 공적 서비스를 개혁해야 한다.

둘째, 여성 전문인력이 적극 활용돼야 한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우리 사회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여성의 더 많은 사회적 진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남녀 간 차별을 해결해야 한다고 충고한 바 있다. 절반의 인재만으로는 세계화가 강제하는 국가간 경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 또 이러한 차별은 인권의 관점에서도 정당하지 않다.

셋째, 가부장적 조직과 문화 또한 변화돼야 한다. 우리나라 사회조직 및 문화는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이효재는 일찍이 우리 사회구조의 성격을 ‘가부장적 권위주의 사회’로 개념화한 바 있다. 이러한 가부장적 조직 및 문화가 지속되는 한 성평등은 요원하다. 공적 조직과 함께 가족을 포함한 사적 영역에서도 성평등 문화의 정착은 매우 중대한 과제다.

지구적 차원에서 여성해방은 도도한 역사적 물결을 이뤄 왔다. 인구의 절반을 이루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양도할 수 없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다. 서구와 우리 사회의 경우 모두 고전적인 여성운동에서 최근 ‘미투 운동’에 이르기까지 여성해방을 위한 일련의 사회운동들은 성평등의 구현에 큰 기여를 해왔다.

오늘날 성평등은 노동 존중, 인권 보호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이룬다. 성평등을 실현하는 데 일차적인 과제는 각종 차별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 개혁이다. 동시에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성평등을 위한 개인적ㆍ집합적 태도 및 의지다. ‘지금, 여기서’의 일상적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성평등과 여성해방을 성취할 때 우리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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