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혁신’이란 단어를 기업보다 많이 사용하는 곳은 없다. 내부적으로는 세뇌될 정도로 많이 듣고 오너나 최고경영자(CEO)들은 대내외 행사에서 빼놓지 않고 강조한다.
기업이 혁신에 목을 매는 이유는 자명하다. 무한경쟁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위태롭다는 위기감의 발로다.
전 세계 주요 기업들 중 혁신으로는 매번 상위 5위 안에 포함되는 삼성전자는 과거 ‘패스트 팔로어’(신속한 추격자)의 대표 주자였다. 일본 업체의 생산시설을 발걸음으로 재고, 눈으로 훑어서 흉내내기 시작한 반도체나 애플 아이폰을 꺾기 위해 달려온 스마트폰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독보적인 메모리 반도체 1위에, 스마트폰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는 1년에 서너 번 이상 세계 최초 제품을 쏟아내며 혁신 기술을 과시한다. 2011년 갤럭시노트를 통해 창출한 펜으로 필기하는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
국내 생활가전 시장으로 범위를 한정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지난 21일 삼성전자가 공개한 의류청정기 ‘에어드레서’를 본 소비자들은 누구나 LG전자가 2011년 처음 선보인 의류관리기 ‘트롬 스타일러’를 떠올렸을 것이다. 두 제품의 구체적인 성능과 특장점은 다르다 해도 옷에 밴 먼지와 냄새를 제거하고 주름을 없애는 핵심 기능이 같은데다, 외관까지 비슷하다.
최근 몇 년 간 삼성전자의 가전 신제품들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해 3월 삼성전자는 전자동세탁기 아래에 드럼세탁기를 결합한 ‘플렉스워시’를 출시했다. LG전자가 드럼세탁기 아래에 통돌이세탁기를 붙여 2015년 내놓은 ‘트윈워시’와는 위치가 바뀌었을 뿐 맥락이 같다. 업계에서는 트윈워시를 결합형 세탁기의 원조로 친다.
지난해 6월 LG전자가 손잡이 부분에 모터가 달린 스틱형 무선청소기 ‘코드제로A9’을 선보이자 삼성전자도 같은 해 9월 상중심 무선청소기 ‘파워건’을 출시했다. 굳이 따지자면 국내에서 먼저 인기몰이를 한 스틱형 무선청소기는 영국 다이슨 제품이지만, 삼성전자가 패스트 팔로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혼수필수품으로 부상한 빨래 건조기 시장도 2004년 LG전자가 먼저 열었다. 해외에서만 건조기를 판매했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국내 시장에 첫 제품을 내놓았다.
LG전자가 시장을 개척하면 뒤늦게 뛰어드는 이유에 대해 삼성전자는 “기술이 없는 게 아니라 사업성이 있을 때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인데, 수익 극대화가 지상 과제인 기업 입장에서 일리는 있다. 삼성전자의 3대 사업 축은 반도체-스마트폰-가전이다. 소비자가전(CE)부문은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 53조6,500억원 가운데 1조6,500억원을 담당했다. 웬만한 대기업에서는 어마어마한 이익이지만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에 그쳤다. 가전 제품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아 손은 많이 가는데 사업적으로 효율성은 높지 않다. 그래도 소비자들이 일상에서 몸으로 체감하기 때문에 브랜드 가치와 직결된다는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가전사업 매출은 삼성전자가 여전히 많아도 영업이익은 지난해 LG전자가 1조1,000억원 이상 앞섰다. 올해 상반기에는 LG전자가 1조2,000억원 이상 격차를 더 벌렸다. “가전은 LG”란 말이 갈수록 소비자들 입에 달라 붙고 있다. 삼성전자 가전은 분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삼성전자 CE부문 대표이사 김현석 사장은 에어드레서 출시 행사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지난 몇 년간 면밀히 분석했고 이제 모든 준비가 됐다”며 신제품 출시를 암시했다.
삼성전자는 2016년 무풍에어컨으로 에어컨의 혁신을 보여줬다. 세탁 중간에 빨래를 투입할 수 있는 애드워시, 올해 2월 출시한 모듈형 공기청정기 큐브도 소비자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 제품이다. 이제 또 한번 가전 혁신으로 소비자를 놀라게 해줄 때가 됐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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