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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배역을 여배우가 연기… 공연계 ‘젠더 프리 캐스팅’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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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배역을 여배우가 연기… 공연계 ‘젠더 프리 캐스팅’ 바람

입력
2018.08.23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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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투운동’ 진앙지 연극계가 

 남성 중심 극작업 관행 깨고 

 여배우에 주체적 배역 주려 시작 

 ‘비평가’ ‘창문 넘어…’ 등 잇따라 

 해외 무대선 적극적 실험 

 다양한 극 해석 끌어내기도 

남성 2인의 논쟁을 다룬 연극 '비평가'는 올해 두 여성 배우의 논쟁으로 무대를 채운다. K아트플래닛 제공
남성 2인의 논쟁을 다룬 연극 '비평가'는 올해 두 여성 배우의 논쟁으로 무대를 채운다. K아트플래닛 제공

멀쑥한 남성 정장을 차려입고, 구두까지 갖춰 신은 두 사람이 늦은 밤 논쟁을 벌인다. 한쪽은 관객들로부터 15분간 기립박수를 받은 연극을 쓴 극작가 스카르파. 다른 한쪽은 언제나 스카르파의 연극을 혹평했던 비평가 볼로디아. 연극 ‘비평가’의 등뼈는 한 치도 물러설 뜻이 없는, 두 사람의 팽팽한 논쟁이다.

어,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남성 극작가와 남성 비평가 간의 논쟁인데, 배우는 백현주, 김신록 두 여성 배우다.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가 쓴 ‘비평가’는 원래 남성 2인극이다. 그래서 묘한 풍경이 만들어진다. 스카르파와 볼로디아는 한창 논쟁을 벌이다 “여배우는 연기를 못한다”고도 하는데, 정작 그 대사를 내뱉는 이는 훌륭하게 연기를 해내고 있는 여성 배우다.

공연계에 ‘젠더 프리 캐스팅(배역에서 성별을 무시하는 캐스팅)’ 바람이 거세다.

여성 배우에게 좀 더 많은 무대를, 그리고 좀 더 주체성을 가진 캐릭터를 제공하자는 의도에서 시작됐다. 동시에 기존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림으로써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들어 있다. 이런 움직임이 일어난 건 당연히 미투 운동이다. 올해 그 어느 때부터 거셌던 미투 운동의 진앙지는, 부끄럽지만 연극계였다. 집단작업이라는 이유로 그간 카리스마적인 남성 지도자를 중심으로 극 작업이 진행되어온 연극계의 관행을 이제는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문제는 연극이 역사가 오랜 장르다 보니 그럴 만한 작품이 드물다는 점. 여성 배우를 전면에 내세우려해도 적당한 배역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 남성 배우 자리에 여성 배우를 집어넣는 것이다. 이영석 연출가가 ‘비평가’에 여성 배우 2명을 투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연출가는 “여성 배우들도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 낼 수 있을 만큼 만만치 않은 연기력을 지니고 있지만 지적인 논쟁을 벌이는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연극계의 현실”이라면서 “이런 식으로 배우의 성별이라도 바꾸어 준다면 왜곡된 현실을 조금 더 상대화시켜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공연에선 남성 배우를 썼다.

소설과 영화로도 유명한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또한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등장인물 60여명을 5명의 배우가 모두 소화해 내야 하는데, 많은 배역을 소화하려다 보니 남녀배우 모두 수시로 성별이 다른 배역을 떠안게 된다. 여성 배우가 젊은 시절의 알란이 되기도 하고, 남성 배우가 엄마 역을 맡기도 한다. 김태형 연출가는 “여성 캐릭터는 물론, 여성 배우들에게도 다양하고 능동적인 색깔을 입혀보자는 생각으로 지이선 극작가와 각색 단계에서부터 젠더 프리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젠더 프리 캐스팅은 간간이 있어왔다. 시초는 2015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꼽힌다. 남성 배우가 해오던 헤롯왕을 여성 배우 김영주에게 맡겼다. 이지나 연출가는 “헤롯왕의 정치적이고도 교활한 모습은 성별에 상관없이 재미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그 이전 2013년에 가수 조권에게 헤롯 역을 맡겼을 때도 남성다움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연출가는 뮤지컬 ‘광화문연가’를 지난해 무대에 올릴 때에도 신적인 존재 ‘월하’ 캐릭터에 정성화는 물론, 차지연도 함께 캐스팅했다. 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의 조력자 딜리아, ‘록키호러쇼’의 외계인 콜롬비아도 남녀 모두 연기했다.

정동극장이 올해 무대에 올린 창극 ‘적벽’에서도 주유, 제갈량 등 남성 책사를 여성 배우가 소화했다. 이수현 정동극장 기획팀장은 “실력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성별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것뿐”이라며 “실제로 여성 배우들이 캐스팅됐고, 여성들도 고전 작품 속 남성 캐릭터를 이해하고 카리스마를 보여 주는 데 무리가 없다는 걸 보여 줬다”고 말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은 해외 무대에서는 이미 시작됐다. 미국에서는 ‘헤드윅’에서 여성 캐릭터인 이츠학을 연기해 토니상을 수상했던 배우 레니 홀이 2016년 ‘헤드윅’에서는 주인공 헤드윅을 맡아 화제가 됐다. 차지연이 오랫동안 ‘헤드윅’ 무대에 서고 싶다고 외쳐 왔으나 성사되지 않았던 것과 대비된다. 독일 배우 벨린드 루스 스티브는 2016년 대본 속 캐릭터를 ‘남성’ ‘여성’ ‘중립’ 세가지 범주로 분석하는 프로그램 ‘네로파’를 개발했다. ‘중립’ 캐릭터에까지도 남성이 주로 캐스팅되는 불균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11월 영국 국립극장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배우 미셸 테리는 “성별, 인종, 장애 유무를 가리지 않는 캐스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관심은 이런 캐스팅의 실제 효과다. 일단 여성 캐릭터가 적극적으로 극에 가세하는 만큼 기존 틀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고무적이다. 하지만 일상성을 뒤집는 것을 넘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공연평론가 지혜원 경희대 교수는 “성별이 단순히 바뀌는 것만으로도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지금까지는 환상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나 조연 수준의 역할에서만 젠더 프리 캐스팅이 주로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젠더가 바뀜에 따라 극의 해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성 정체성과 성 역할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이 어떻게 다양해질 수 있는지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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