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의 문언이다. 대한민국에서 지금처럼 위 문장의 의미가 중압감을 가지고 무겁게 다가왔을 때가 또 있을까 싶다.
법관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행되는 사건의 외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 설사 그 외적 조건이 국가경제의 존망에 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존망에 대한 의견이 법정 내에서 소송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진술된 것이 아니라면, 이를 재판외적으로 고려해서는 안 된다. 이는 국가권력의 구성요소로서 입법권, 행정권과 구별되는 사법권을 별도로 둔 이상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헌법상의 조건이다. 따라서 대통령 비서실장 주관하에 행정부처의 장들과 법관이 회동하고 특정 사건의 진행방향에 대해 논의를 해서 그것이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는 사법부의 존립 근거 자체를 흔드는 심각한 일이다.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법관이 영향을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재판해야 하는 외적 여건에는 그 시점에서 살아있는 권력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시기에 강력하게 형성되었어 있는 여론 역시 법관이 재판에 있어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는 외적 여건 중 하나이다. 특히, 죄형법정주의와 처벌불소급의 원칙이 적용되는 형사재판의 영역은 더욱 그러하다.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여러 행위들 중 어떤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고 처벌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는 사전에 미리 정해진 법률에 규정되어 있어야 하고, 처벌법규는 원칙적으로 그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원시사회에서 문명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권력지형의 변화에 따라 끝없이 반복되는 피의 보복 구조를 끊겠다는 엄중한 결단이다. 물론 피고인이 부담해야 하는 정치적 책임, 도덕적 책임, 민사적 책임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러한 법관의 독립의 엄중함을 생각하면, 법관은 사회의 여러 직업 중에서 가장 외로운 직업이다. 가장 외로운 직업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법관으로 선발되어야 한다. 법복을 벗고 거리로 나서는 순간 마찬가지로 더할 수 없이 나약한 여느 인간 중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는 어떤 외부적 여건으로부터도 독립되어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법관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져서도 안되지만,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서도 안 된다. 법관이 판단의 준거로 삼는 양심은 헌법과 법률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특정한 이념적 지향을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판결문에 담거나 아직 규범적 관행으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재판 당사자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적인 사고와 이를 통한 사회의 진보는 정치의 영역과 민간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사법부에 기대할 일은 아니다.
법관에게 부여되는 이처럼 무거운 권한과 책임을 생각하면, 제도적으로 법관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먼저, 그 역할에 상응하는 덕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법관으로 선발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덕성과 능력이 극한의 비인간적인 수험생활을 견디고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획득하는 능력과 반드시 함께 가는 것은 아니다. 심급구조와 상고제도를 포함해서 법관이 개개의 사건에 정성을 기울이고 독립적으로 재판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12명의 대법관으로 하여금 매년 4만여 건의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면서 개개의 사건에서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가 충분히 보살펴지고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한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 여건이 변화하지 않는 이상은 노동전문가, 여성 등으로 아무리 대법원 구성을 다양화하더라도 다 무용할 뿐이다.
허성욱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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