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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역지사지의 상상력

입력
2018.08.16 17:26
수정
2018.08.17 09:4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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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도지가 14일 1심 선고를 마치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 안 전 지사는 비서 김지은씨에게 할 말 없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류효진 기자
안희정 전 충남도지가 14일 1심 선고를 마치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 안 전 지사는 비서 김지은씨에게 할 말 없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류효진 기자

내가 기자가 된 후 일터에서 받은 가장 충격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시상식 뒤풀이 장소 예약할 건데, 미리 주문할 안주로 치킨이 좋을까요? 훈제족발이 좋을까요?” 발화의 주인공은 문학담당 선배. 갓 문화부 발령받은 새내기에게 살뜰한 관심을 건네고자 농반진반으로 물은 건데, 당시 사회 초년생의 통과의례인 커피타기, 복사하기를 안 하는 직장으로 신문사를 택했던 나로서는 저 질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 내 준 취재원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것,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를 준비하는 것이 ‘자아실현’을 위해 감당해야 할 단순노무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걸 알게 된 건 시간이 좀 지나서다.

깨달음이 지나쳐 내가 문학담당이 됐던 해, 스스로 부여한 ‘미션’이 있었으니 신춘문예 심사 뒤풀이 장소로 담배 필 수 있는 식당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물론 누구도 강요한 적 없다. 공공장소 의무 금연 시행 초기, 영세 영업장에서는 흡연이 가능했고 굳이 그런 곳을 찾아 골초 문인들과 밥을 먹는 게 ‘잘 대접하는 거’라 착각했다. 비흡연자인 내가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흡연권을 걱정하는 이 역지사지의 상상력은, 여성인 내가 남성 취재원의 성적 농담을 쿨한 척,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태도에도 작동됐다. 미투가 활성화되고 칭송됐던 남성 작가들의 ‘쿨했던’ 작품이 여성혐오로 재해석됐을 때, 나는 내 무딘 젠더감수성을 자책하지 않았다. 다만 그 시대 인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내 깜냥에 실망했고 나의 공감능력은 왜 항상 강자를 향했던 건가를 반성했다.

사회적 동의는 시대마다 달라진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희생이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의 문제로 인식하는 지도자 발언이 나온 배경이다. “군대 위안부 문제는 일본 측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은 필요하지 않다(…)그런 점에서 우리가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새로운 한일관계 정립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민족의 도덕적 우위’로 해석한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저 발언이 여성혐오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양국 간 외교적 해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성폭력과 여성의 인권 문제”라고 한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이 페미니즘적 발언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나는 저 두 사람의 말이 그 시대의 지도자, 그 지도자를 뽑은 국민의 인식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문 대통령의 저 연설이 나온 날,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범위에 대한 사회적 동의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회적 동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나 보다. 역지사지 상상력이 부족한, 그래서 1심 판결에 대한 여성의 집단 분노를 이해할 수 없는 분들께 이 사건을 ‘학교 폭력에 대입시켜 보시라’ 권한다. 요컨대 ▦처음 당했을 때 너무 놀라 상황 파악이 안 되고 ▦문제가 심각하다고 학생이 느낄 때는 이미 폭력이 꽤 반복된 상황이며 ▦신고제도가 없는 건 아니지만 부모, 교사, 심지어 친한 친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위력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저 판결문을 읽어보시라.

“매우 당황하여 바닥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방식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였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피고인의 요구에 따라 피고인을 살짝 안는 행위로 나아가기도 했습니다(…)업무관련자와 피고인뿐만 아니라 굳이 가식의 태도를 취할 필요도 없이 친하게 지내는 지인과의 상시적인 대화에서도 지속적으로 피고인을 지지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습니다.(…)단지 간음피해를 잊고 수행비서의 일로서 피고인을 열심히 수행하려 한 것뿐이라는 피해자의 주장에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강자가 아닌 약자를 향한 공감능력이 확대될 때 사회적 대화, 사회적 동의의 수준도 진일보 할 것이다.

이윤주 지역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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