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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신분증으로 I-보팅, 지구 반대편서도 1분 만에 한 표

입력
2018.08.20 04:4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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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최강국 에스토니아

정보 교환 플랫폼 ‘엑스로드’에

전자신분증으로 접속만 하면

뱅킹∙납세∙쇼핑 등도 간단 처리

인터넷 투표 종료 시점까지

지지 후보 바꿀 수도 있어

유권자 참정권 끝까지 보장

환자정보포털에 들어가면

본인이 모든 치료 기록 확인

의료소비자 주권도 확보 가능

에스토니아 국적의 마리엘(23)씨가 지난달 2일 수도 탈린의 한 카페에서 자신의 의료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환자정보 포털에 접속하고 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에스토니아 국적의 마리엘(23)씨가 지난달 2일 수도 탈린의 한 카페에서 자신의 의료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환자정보 포털에 접속하고 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에스토니아 국적의 레베인(26)씨는 지난해 10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집에 앉아 4년마다 열리는 에스토니아 지방의회 선거에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한국에는 주한 에스토니아 대사관도 없고, 7,103㎞ 떨어진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치러지는 선거지만 문제가 안 됐다. 와이파이가 연결된 컴퓨터를 켠 뒤 투표를 마치기까지 1분이면 충분했다. 레베인씨는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 인터넷 투표(I-voting)는 이제 삶의 일부분”이라며 “투표를 하기 위해서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진정 우리의 일상이 된다”고 말했다.

블록체인을 이용한 전자신분증과 엑스로드(X-road)

에스토니아의 민주주의는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엑스로드(X-road)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엑스로드는 국가의 개별 기관뿐만 아니라 사기업까지 포함해 분산된 정보를 공유하고 연결해주는 정보 교환 플랫폼이다. 현재 400여개 정부 기관과 600여개 사기업이 엑스로드에 연결돼 있다.

엑스로드가 뼈대 역할을 한다면, 전자신분증(ID-Card)은 블록체인 민주주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열쇠다. 전자신분증과 컴퓨터만 있다면 은행 업무, 디지털 서명, 회사 설립, 납세, 쇼핑 등을 모두 처리할 수 있다. 2002년에 도입된 전자신분증은 15세 이상 시민이라면 모두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현재까지 130여만명에 해당하는 인구 중 98%가 전자신분증을 사용하고 있다. 휴대폰으로 모바일 전자신분증을 다운받는 것도 가능하다. 안드루스 카아렐손 에스토니아 국가정보부장은 지난달 탈린 국가정보시스템국에서 기자와 만나 “전자신분증은 에스토니아 성공 신화의 비결이고 그 신화의 기반은 엑스로드 구축”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수많은 기관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만큼 개인정보가 노출되거나 조작될 위험성도 커진다. 블록체인 기술이 사용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유르겐 수바로브 엑스로드 운영책임자는 “블록체인을 사용해 정보의 무결성(의도적으로 변경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는 특성)을 검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 정보 그 자체가 아닌 해시값(디지털 지문 역할을 하는 자료의 원본 고유 코드)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정보의 위ㆍ변조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에스토니아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누가 자신의 정보를 열람했고, 수정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마틴스 따르비 에스토니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인터넷투표 국장이 7월 4일 수도 탈린에 위치한 선관위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마틴스 따르비 에스토니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인터넷투표 국장이 7월 4일 수도 탈린에 위치한 선관위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블록체인 거버넌스로 참정권 확대

블록체인 민주주의 덕에 에스토니아 시민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다. 2005년부터 세계 최초로 공식선거에 도입한 인터넷 투표가 대표적이다. 투표소 문이 닫힌 시간에도 투표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해외에 거주하고 있더라도 에스토니아 시민이라면 참정권을 행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1주일간의 사전투표 기간 동안 언제 어디서라도 컴퓨터만 있다면 투표가 가능한 서비스 덕분이다. 처음으로 인터넷 투표가 도입된 2005년에는 유권자의 2%가 참여했지만, 가장 최근 치러진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 3명 중 1명꼴로 참여했을 정도로 대중화됐다. 마틴스 따르비 선관위 인터넷투표 국장은 “처음 1~2회 선거는 2030세대의 남성 참여자가 높았지만 이제는 연령ㆍ성별 격차가 없어졌다”고 강조했다.

에스토니아는 단순히 인터넷을 통해 선거를 치른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유권자의 참정권을 끝까지 보장해주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사전투표 종료 시점까지 얼마든지 지지후보를 바꿀 수 있는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덕분에 라크베레시에 사는 카스크 코르베(64)씨도 지난 지방선거에서 지지 후보를 바꿀 수 있었다. “이미 투표를 마친 상태에서 다른 후보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알게 됐고 지지 후보를 바꾸었습니다. 투표를 바꿀 수 없었다면, 제 선거권을 낭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지하지 않는 후보를 뽑는 결과를 가져왔겠지요.”

7월 2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위치한 탈린중앙병원에서 54년 차 베테랑 의사 라글레 슈로그(75)씨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7월 2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위치한 탈린중앙병원에서 54년 차 베테랑 의사 라글레 슈로그(75)씨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보의 자기결정권 보장으로 의료주권 확대도

블록체인 기술은 의료주권의 확대도 가져왔다. 건강정보시스템(E-health) 도입으로 시민들이 자신의 의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자율성을 향상시킨 덕이다. 그 결과 절체절명의 순간 생사가 결정되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에스토니아 국민은 환자정보포털에 접속하면 평생 받아온 진료기록, 처방전, X-ray 등 모든 기록에 빠짐없이 접근할 수 있다. 2015년 이후 의료 정보의 95%가 디지털 문서로 기록돼 환자정보포털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어떤 치료를 받고 어떤 처방을 받았는지 의사뿐만 아니라 환자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료소비자 주권을 확보할 수 있다. 환자의 의사에 따라 민감한 정보는 선택적으로 차단할 수도 있다. 지난달 탈린에 위치한 탈린중앙병원에서 만난 54년 차 베테랑 의사 라글레 슈로그(75)씨는 “에스토니아의 전자신분증에는 환자의 출생부터 현재까지 모든 의료기록이 빼곡히 담긴 정보가 있다”며 “의사는 환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치료를 받았고 어떤 약을 처방 받았는지 순식간에 파악한 뒤 최적의 진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슈로그씨는 “진료할 때 종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물론, 환자의 의료정보 데이터를 저장할 때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돼 환자와 의자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진료가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선거, 의료 등 국가 공공서비스의 99%를 온라인 상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동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는 이웃 국가들이 동경하는 ‘강소국’이 됐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 정부가 블록체인 등 최신 기술을 기반으로 ‘E-거버넌스’ 정부를 추구한 결과다. 2016년 발표된 유엔 전자정부 발전지수 따르면, 에스토니아는 독립 26년 만에 193개국 중 13위를 차지했다.

탈린=글ㆍ사진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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