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국제학술대회
18ㆍ19세기 英ㆍ佛 탐사기록 통해
日 독도 영유권 주장의 허점 찾아
“엄청나게 크고 깎아지른 듯 수직적인 바위(tremendous and perpendicular rock).”
동해 탐사 중 우연히 맞닥뜨린 섬을 나타낸 표현이다. 이 바위는 어떤 섬이었을까. 1791년 해달 모피 무역을 위해 아메리카를 건너 아시아로 가던 영국의 상선 프린스웨일즈호는 모피 판매 루트를 뚫으려다 동해상으로 진입했고 그해 8월 30일 항해일지에 이 같은 표현을 남겼다. 울릉도 북쪽에서 발견한 이 섬에다 아르고노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발견으로 세계지도의 동해상에는 울릉도 독도 외에 아르고노트라는 섬 이름이 등장했다. 그러나 1852년 관측 조사 등의 임무를 받아 동해에 진입한 프랑스 군함 카프리시즈호는 이 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 인해 세계지도상 아르고노트섬은 차차 사라져갔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연구의 성과와 과제, 그리고 전망’을 주제로 13, 14일 여는 국제학술대회에서는 바로 이 아르고노트 섬 탐사 과정이 독도 영유권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던져 준다는 발표문이 나온다. 14일 김종근ㆍ이상균 연구위원이 내놓는 ‘영국 탐험가 제임스 콜넷의 동해 항해와 아르고노트섬의 발견’이란 글이다. 콜넷의 프린스웨일즈호 항해는 독도 문제와 관련되어 거론되긴 했지만, 잘못 알려진 정보가 많아 두 연구위원은 이를 일일이 바로 잡아 나갔다. 이 작업을 한 것은 독도 문제를 다룰 때 주로 한일의 역사적 인식이나 국제법 문제가 등장하는 것과 달리, 이번엔 제3자인 외국의 탐사 기록을 제대로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18, 19세기는 서구 열강의 전 지구적 탐사 작업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지리적 발견 경쟁이 불붙었고 서로 간에 발견을 크로스체크해 주는 관행이 정착해 갔다. 울릉도 독도도 그랬다. 먼저 울릉도에 도달한 건 프랑스였다. 다즐레라 이름 붙였다. 그러자 영국이 아르고노트를 찾아냈다. 독도도 그랬다. 먼저 도달한 프랑스는 이를 리앙쿠르암이라 불렀고, 영국은 이 섬에다 호넷이란 이름을 붙였다. 경쟁적 탐사로 인한 것이었다. 아르고노트의 존재가 부정되는 데는 영국의 성취를 깎아내리려는 프랑스의 의도가 어느 정도 개입된 일이었다.
중요한 건 다즐레, 리앙쿠르암과 함께 아르고노트까지 존재한다는 생각이 퍼져 있을 때 일본의 태도다. 원래 일본은 울릉도 독도를 각각 다케시마(竹島), 마쓰시마(松島)라 불렀다. 이때 일본에 수입된 서양 해도엔 아르고노트, 다즐레, 리앙쿠르암 세 섬이 그려져 있었다. 일본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아르고노트를 다케시마라 칭했고, 나중에 아르고노트섬이 부정당하자 다케시마를 빼버렸다. 그 뒤 독도의 표기를 리앙쿠르암에서 다케시마로 고쳤다. 다케시마란 이름이 울릉도, 아르고노트, 독도로 계속 바뀐 셈인데 이는 결국 독도에 대한 역사적 영유권 의식이 미약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김종근ㆍ이상균 연구위원의 주장이다.
독도연구소 1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학술대회인 만큼 13일에는 분야별 독도 관련 연구 동향과 성과에 관한 주제 발표와 전문가 좌담회가 열린다. 14일은 아르고노트섬 발표를 포함, 서구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그리고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발표가 진행된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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