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휴가 보내기 (바래/바라).” 이 문장에선 ‘바라’가 맞지만 이렇게 쓰는 건 어색하고, ‘바래’는 자연스럽지만 이는 어법에 맞지 않는다. ‘바라다’가 기본형이니 그 명령형으론 ‘바라’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고쳐 쓴다. “즐거운 휴가 보내기 바란다”로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차마 “나의 바램”은 쓸 수 없어 “나의 희망”으로 바꿔 쓰기도 한다. 기본형을 ‘바라다’로 한정하는 한 이런 고쳐쓰기는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러움이 생명인 노랫말에선 이에 관한 한 아예 규범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나 “날 사랑해 주길 바래”처럼. 이쯤 되면 사람들의 머릿속엔 ‘바래다’가 하나의 기본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바라다’와 ‘바래다’가 같은 뜻의 말로 동등하게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떨까? “깜짝이야, 왜 사람을 (놀래켜/놀래)?” 이 문장에선 ‘놀래’가 맞지만 이렇게 쓰는 건 어색하고, ‘놀래켜’는 자연스럽지만 표준어가 아니다. ‘놀라다’의 사동사로는 ‘놀래다’만이 인정되기 때문. 이런 상황에선 ‘놀래’를 쓰는 것도 ‘놀래켜’를 쓰는 것도 찜찜하니, 이 문장을 “깜짝이야, 왜 사람을 놀라게 해?”로 고쳐 쓰게 된다. 그러나 충청 방언으로 취급되는 ‘놀래키다’의 사용빈도가 사동사 ‘놀래다’를 압도하는 건 엄연한 현실. 이처럼 ‘놀래키다’가 널리 쓰이는 걸 보면,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사동사 ‘놀래다’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고, ‘놀래다’가 ‘놀라다’와 같은 뜻의 말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놀래키다’만큼 ‘놀라키다’도 만만치 않게 쓰인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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