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라고? 아무리 혼자 볼 거여도 좀 잘 그리고 싶은데. 일러스트부터 배울까? 색연필부터 살까?” 정은혜 미술치료사가 답한다. “전형적인 한국인입니다.” 뭐든 원하는 걸 그리라고 하면 당황부터 한다는 내담자들이 그림일기에 대해 자주 하는 질문과 정은혜 미술치료사의 조언을 정리했다.
Q. 그림을 정말로 못 그려요.
A. 현대미술을 보세요. 완벽하게 그리는 건 전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아요. 수백, 수천 시간씩 스케치하며 기술을 연마한 미대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당황할 정도죠. 몇 호 붓으로 그릴까? 무슨 색으로 그릴까? 이런 걸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두려워도 백지를 마주하세요. 그걸 뚫고 나가지 않으면 내 것을 만드는, 내 것을 창조하는 즐거움을 영영 느낄 수가 없어요. 엄마의 립스틱까지도 연필 삼아 아무 데나 마음대로 낙서하는 아이들의 표정, 정말 즐거워 보이잖아요. 필요한 건 그런 자세 하나면 돼요. 그리기는 배우지 않고도 우리가 잘하던 것이며 좋아하고 즐기던 거에요.
Q. 그래도 기초는 배워야죠?
A. 수학은 그래요. 덧셈과 곱셈을 배워야 미적분을 풀 수 있죠. 하지만 예술은 아니에요.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울 땐 무반주 첼로 조곡을 한마디씩 연주하는 게 첫 레슨이었대요. 꼭 ‘1+1=2’부터 배우지 않아도 돼요. 기본기를 완벽히 익힌 다음에 하려면 즐거움을 찾기 힘들어요. 잘하는 방법을 다 배울 때까지 안 하려니까 해 본 적이 없게 돼요. 정 필요하다면 간단한 기술들만 익히면 돼요.
Q. 습관 들이기가 힘들어요.
A. 자신의 일과를 관찰하고 나름의 의식을 만드세요. 꼭 밤일 필요도 없어요. 전 주로 아침에 일과를 시작하기 전 (그림일기를)써요. 꿈이 생생한 편이고, 그림처럼 꿈에서 무의식이 많이 반영되다 보니, 꿈의 잔상이 남아 있을 때 그리려는 거에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 떠오르는 상징, 이미지, 느낌을 따라가기가 좋은 때인 것 같아요. 사람마다 습관과 일상이 다를 테니 자기 조건에 맞춰서 하면 돼요.
Q. 그림 그리고 있기엔 너무 바빠요.
A. 전 바쁠 때는 딱 1분을 써요. 5분만 쓰겠다 생각하고 임하세요. 하다 보면 재미있어서 더 하게 되겠지만요. 꼭 매일일 필요도 없이 가급적 자주 하자는 정도에요. 매일매일 만나는 일기의 형식이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 주죠.
Q. 컬러링북으로 대신하면 안 될까요
A. 컬러링북은 성공을 보장하죠. 밑그림이 있으니 실패의 두려움은 최소한이고, 성공의 기쁨은 최대한이고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삶은 빈 종이를 자꾸 마주하는 과정이잖아요. 백지 앞에서 헤매보고 그 위에 점과 선을 그어볼 때, 내 나름의 자국을 만들 때만 느끼는 즐거움이 따로 있거든요. 한두 번 한다고 삶이 크게 변한다곤 할 순 없지만 그 시간이 모여 변화의 시작이 되죠. 빈 종이의 두려움을 끌어안는 법, 그림과 다시 친해지는 방법을 어렴풋이 느끼고 나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올걸요.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미있냐!”
글ㆍ사진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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