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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누진제와 생존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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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누진제와 생존의 조건

입력
2018.08.0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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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은행은 오아시스였다. 거의 유일하게 에어컨이 잘 나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창구에 사람이 많아 기다려도 좋았다. 오랫동안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었으니까. 한때 에어컨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특별소비세가 부과되기도 했다.

지난 수년간 열대지방보다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그 위세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요즘 날씨에 에어컨 없이 하루를 보내라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생명과 신체에 위해가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 정도면 에어컨 사용은 기본적 인권에 해당하는 사항이다. 폭염을 재난의 범위에 포함시키자는 국회의 재난안전법 개정 움직임과 정부의 재난에 준한 대응상황도 이를 반증한다.

생존의 조건에 누진적 요금이 부과되는 것은 맞지 않다. 에어컨이 살인적 폭염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전제라면 소득에 상관없이 적정한 요금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보편적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취약계층에 대한 에너지 지원은 별도의 복지로 배려해야 한다.

최근 전기요금 누진제의 법적근거인 전기사업법 제16조를 개정하여 누진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법안들이 나오고 있다. 전기요금은 전기사업법에 근거해 한전이 공급약관을 정하고 산자부가 승인하는 구조이다. 약관을 통해 전기요금을 정한다는 점에서 형식은 공급자와 소비자간 계약이지만 실질은 국가가 요금을 정하는 방식이다.

누진제의 전면적 폐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전력낭비에 대한 우려이다. 그래서 많은 국가에서 누진제를 두고 있다. 전력수급, 한국전력의 운영 및 재정부담,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전환 등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절충적으로 7월과 8월에 한해서만 누진제를 적용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계측인프라가 갖추어 진다면 정부가 재난안전법에 근거하여 일정기준의 폭염에 대해서는 준재난상황을 선포하고 그 기간 동안에는 누진제를 적용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반론으로 과소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사용량이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사람들은 일정한 생활패턴이 있다는 점, 공짜로 전기를 쓰라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누진되지 않은 요금은 납부한다는 점에서 과소비를 단정할 수도 없다.

누진제는 형평성 문제도 안고 있다. 누진제의 기원은 1974년 석유파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출을 해서 먹고 살아야 했던 터라 산업용 전력 확보가 불가피했고, 가계는 불균형적인 요금체계를 받아들였다. 지금도 84%에 해당하는 산업 및 상업·공공용이 누리는 낮은 전기요금을 13%에 불과한 가정에서 사실상 보전해주고 있다. 에어컨을 튼 채 문을 열고 영업하는 이유이다. GDP대비 산업용 전력소비량은 OECD 국가 중 4위인 반면, 주택용은 26위에 불과하다. 산업·상업용 전기요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누진제에 대한 저항은 법정으로 가고 있다. 2017년, 헌법재판소에 전기사업법 제16조 제1항의 위헌심판이 제청되어 진행 중이다. 2016년, 서울중앙지법에 소비자들이 누진제를 정한 한전의 보통계약약관이 신의성실을 위반하였으므로, 부당약관을 금지한 약관규제법 제6조에 따라 무효라며 소를 제기하였다. 법원은 전력공급의 특수성 등을 고려할 때 약관이 소비자에게 부당한 불이익을 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하여 한전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2017년 내려진 인천지법의 판결에서는 사실상 강제적인 계약에서 요금체계가 다른 집단(산업·상업)에 비해 특정 집단(주택)에 희생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의 여지가 없는 경우라면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지난 새벽에도 더위에 잠에서 깨어 에어컨을 켤까 망설이며 리모콘을 만지작거렸다. 대부분 가정의 일상일 것이다. 에어컨이 생존의 조건이 된 지금, 뭐라도 대책이 나와야 되지 않는가.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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