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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기를···

입력
2018.08.0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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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발 크기 머그잔 한 가득 커피를 부어 꿀꺽꿀꺽 마신다. 이렇게라도 해야 말짱한 정신으로 하루 일을 시작할 수 있어서다. 카페인의 효과는 참으로 대단해서 물컹하게 곯아버린 것 같던 심신이 금세 탄력을 받는다. 한낮 땡볕 아래서 하는 작업도 아니고, 사무실에 틀어박혀 원고를 매만지는 일이다. 진한 커피 두어 잔이면 너끈히 이겨낼 수 있다. 게다가 열흘 남짓만 더 버텨 광복절을 맞을 무렵이면 폭염에서도 해방될 터이다. 그렇게 2018년 여름도 곧 지나간 추억으로 남을 것임을 경험을 통해 안다.

기억하기로 1994년 여름도 아주 더웠다. 그러나 그 해의 폭염은, 내게 체감한 더위가 아니라 몇 컷의 이색적인 풍경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 무더위가 오면 TV에서 내보내는 단골 화면들이 있었다. 햇살 아래 엿가락처럼 늘어진 철로와, 철로보다 더 애처롭게 늘어진 런닝셔츠 바람으로 멱살잡이하는 사내들의 모습이 뉴스 화면에 잡혔다. 슈퍼마켓 평상에서 사이좋게 소주를 나눠 마시던 아저씨들, 운전 중이던 앞뒤 차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다짜고짜 부둥켜안고 격투기를 했다. 그렇게 남자들이 육박전을 펼치던 날, 불쾌지수는 80을 넘었다. 한데 1994년 여름, 폭염을 보도하는 기자는 달랐다. 펄펄 끓는 한낮의 햇살로 달궈진 자동차 보닛 위에 달걀을 깨뜨렸다. 아스팔트 도로 대신 자동차 철판 위로 올라간 날달걀은 금세 먹기 좋은 색깔의 반숙으로 변했고, 이 뉴스는 그 해의 더위를 강조하는 장면으로 내 뇌리에 박혀버렸다.

그 여름 언니네 집에 얹혀살던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을 읽었다. 바깥 더위를 식히고도 남는 서늘한 공포가 책 속에 있었다. 어느 토요일 낮,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읽는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반복적으로 났다. 물소리, 현관문이 닫혔다 다시 열리는 소리, 물소리, 다시 현관문 열리는 소리···.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주방부터 현관까지 물이 흥건했다. 대낮인데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조심조심 물 자국을 따라가니 100미터쯤 떨어진 대로변까지 이어졌다.

이런이런! 네 살 조카가 플라타너스나무 가로수에 물을 주고 있었다. 조그만 찻주전자로 날라서 나무 밑동 곳곳에 뿌린 물 자국이 내 눈에 들어왔다. 꼭 강아지가 오줌을 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얘들이 너무 목마르고 아픈가봐.”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된 아이가 시들시들 말라가는 나뭇잎들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이걸 어째야 좋을까. 잠시 난감하던 순간, 스스로도 놀랄 지혜가 내 머리에서 나왔다. 아이의 손을 잡고 철물점으로 갔다. 사정을 말하자 주인 아저씨는 아주 기다란 호스를 공짜로 빌려주고 대로변에 있는 자신의 집 수도까지 무료로 개방했다. 그해 여름이 물러갈 때까지, 나와 조카는 호스를 들고 플라타너스나무 가로수에 물을 주었다.

다시 폭염으로 들끓은 여름. 야리야리하던 24년 전의 플라타너스나무는 아름드리 가로수로 변모했다. 땀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일깨우던 네 살 아이도 스물여덟 건강한 아가씨로 성장했다. 다만 그때의 풍경만은 조지 오웰의 소설 내용보다 더 선명한 기억으로 내 머리에 각인돼 땡볕 아래 안전모를 쓰고 일하는 이를 볼 때마다, 땀으로 흥건한 택배기사의 얼굴과 맞닥뜨릴 때마다 무시로 오버랩된다. 조금만 참으면 여름은 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날계란을 반숙으로 만들어 버리는 폭염 아래서 망치질을 하고, 가격이 곤두박질친 폐지를 팔아 생계를 이어야 하는 노인은 재난경보가 내린 날에도 리어카를 끌고 거리에 나선다.

누적된 수면부족에 맞서려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버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바라건대, 2018년 이 여름이 카페인중독만으로 기억되기를. 모든 분들이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기를···.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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