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10~20년 후 농민이 스포츠카 타는 시대가 올 것"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가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 말이다.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농사짓는 기자’가 대한민국의 ‘촉망받는 농업 CEO’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스르륵"
밤 9시가 넘은 시각 또 문이 열렸다. 주변 상가 불은 모두 꺼졌지만 작은 ‘동네빵집’의 자동문만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여닫기를 반복했다.
전북 군산에 위치한 ‘영국빵집’은 경력 48년의 제빵사 정석균(65) 대표가 1984년 문을 열어 35년째 운영 중인 제과점이다. 겉만 보면 흔한 동네 빵집과 다를 게 없지만, 영국빵집은 지역특산물인 흰찰쌀보리를 이용해 연 1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유명 ‘맛집’이다. ‘‘이성당’과 함께 군산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탄탄대로를 걸어온 듯 보이지만, 위기도 있었다. IMF로 지역 경기가 죽으면서 빵의 판매가 급감해 처음 위기를 겪었고,2000년대 초에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등장이 문제였다. 동네 빵집들은 줄줄이 폐업했고, 영국빵집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대로 망할 수 없다’며 이를 악물던 그때 정 대표가 주목한 것이 바로 ‘흰찰쌀보리’였다. 군산 흰찰쌀보리는 식이섬유가 풍부해 포만감을 주고 특히 베타카로틴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당뇨 등 성인병 예방과 변비개선, 다이어트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어요. 우연히 참석한 요리강습에서 흰찰쌀보리로 쿠키를 만드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빵으로 만드는 도전을 시작했죠."
아이디어를 얻은 정석균 대표는 당시 빵집이 문을 닫는 자정부터 새벽 2~3시까지 매일 흰찰쌀보리를 반죽해 빵을 구워냈다. 수백, 수천 번 반죽과 구워내기를 반복했지만 원하는 결과물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았다.
주변 친한 제빵사들에게 흰찰쌀보리빵을 함께 연구해 보자는 말도 건네봤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았다.
"보리로는 쉽게 되지 않는다는 걸 제빵사들도 다 알고 있었으니 당연했죠."
우리가 먹는 빵의 쫀득함은 밀가루의 글루텐 성분에서 나오지만, 흰찰쌀보리는 이런 특성이 거의 없다. 다시 말해 흰찰쌀보리로는 기존 빵이 가진 쫀득함을 만들 수 없다는 의미였고, 제빵사라면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 대표는 밀가루와 흰찰쌀보리의 비율을 조금씩 조절해 보며 실험과 연구를 거듭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흰찰쌀보리빵은 연구 시작 1년 만인 2012년 드디어 완성됐다. 기존 빵이 가진 고유의 식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흰찰쌀보리가 사용된 빵은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빵이 완성되자 정석균 대표는 흰찰쌀보리빵을 홍보하기 위해 전국 축제장을 찾아다녔다. 즉석에서 반죽한 흰찰쌀보리로 꽈배기를 만들어 튀겨냈고, ‘만쥬’를 상자에 담아 팔았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아 준비한 재료가 모두 소진되는 건 당연했다. 축제가 끝난 후 흰찰쌀보리빵을 전화로 재주문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됐다. 이거다. 그때 환호를 불렀어요. 다른 빵집에 없는 우리만의 빵을 개발했으니 이제는 길이 보인다 생각했죠.”
흰찰쌀보리 빵이 점차 입소문을 타자 지역 기관에서도 흰찰쌀보리를 이용해 빵 레시피를 공동 개발해 보자고 제안 해왔다.
정석균 대표는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자신이 연구한 흰찰쌀보리빵 레시피를 모두 공개했다.여기에 기관이 가진 노하우가 더해지면서 한층 더 발전된 레시피가 완성됐다.
이 레시피를 기본으로 해 현재 20여 개의 군산 제과점에서는 흰찰쌀보리빵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흰찰쌀보리빵 판매 제과점이 많아지고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보리 생산자인 농업인들의 소득까지 함께 높아졌다.
레시피 공개 후 군산 동네빵집의 매출은 평균 20% 이상 동반 상승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정 대표는 2014년 전국소상공인대회에서 모범소상공인으로 선정, 산업포장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 대표와 함께 아들 요한(37) 씨도 빵집 운영을 함께하고 있다. 요한씨는 호주의 제과점에서 제빵 기술을 배웠고, 서울의 유명 제과 명장에게 기술도 전수받았다.
아버지인 정 대표가 운영하는 영국빵집에서 일을 시작해도 충분했지만, 정 대표는 좀 더 큰 제과점을 경험하고 오라고아들에게 조언했다. 그렇게 제빵 유학 후 돌아온 아들은 이제 영국빵집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자 대를 이어 도시와 농촌 상생의 길을 찾고 있는 청년이 됐다.
정석균 대표 역시 아들이 자신보다 흰찰쌀보리빵을 더 유명한 군산의 명물로 만들어 주길 기대한다.
"제가 레시피 하나를 내려놓으니, 지역 주민들이 입소문을 내주고 그 덕에 유명한 빵집이 될 수 있었잖아요. 어려울수록 돕는다면 지금 어려운 군산도 좀 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저와 아들 역시 그런 사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원하고요."
군산=글 ·사진 김태헌 기자 119@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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