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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지요”

입력
2018.07.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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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문건 일부. TV화면 캡쳐
장자연 문건 일부. TV화면 캡쳐

2009년 3월 7일. 배우 장자연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첫 소식은 대부분 신문 지상에서 ‘1단 뉴스’에 불과했다. 당시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조연 정도로만 알려진 20대 후반의 여배우. 우울증 치료를 받아왔고, 소속사와 재계약 문제로 고통스러워했다는 전언만이 죽은 자의 내뱉지 못한 유언을 대신했다. 기껏해야 200자 원고지 3, 4매 분량에 불과했던 부고 기사가 말해주듯, 9년 전 그날 대중에게 장자연의 죽음은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가 죽기 약 1주일 전 작성한 이른바 ‘장자연 문건’이 세간에 알려지고, 죽음의 배후에 성 접대를 강요하고 약점을 물고 늘어져 협박한 폭력이 웅크리고 있었다는 정황이 나오면서 세상은 장자연의 죽음을 더 이상 장자연 개인의 죽음으로 바라보지 않게 됐다. 이후 1년 동안 종합 일간지들은 지면에서 ‘장자연’을 2,300여 차례나 언급하며 보도에 열을 올렸다.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늦깎이 배우가 명줄을 손에 쥔 소속사 대표로부터 술자리 참여를 강요 받고, 그 자리에서 명망가들의 노리개가 돼 끝내 죽음을 선택한 비극. 수사가 진행되고, 대중은 어머니의 기일에마저 술자리에 불려와 울었던 원혼의 한이 풀리길 간절히 바랐던 때다.

그러나 9년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끝내 이 죽음에 책임진 이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검ㆍ경의 뛰어난 수사력은 투명 장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누가 장자연에게 성 접대를 강요해 죽도록 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죽음의 책임자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손만이 꼿꼿이 선 세상. 다행스럽게 지난 6월 검찰의 장자연 사건 재조사가 시작됐고, 이후 두 달여가 흘렀다.

국민청원이 이끌어낸 검찰의 재조사는 그러나 전 조선일보 기자 한 명을 불구속 기소하는데 도달한 후,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장자연 행적의 열쇠를 쥐고 있으리라 여겨져 온 매니저 소환 정도만 이뤄지고, 정작 검ㆍ경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아온 조선일보 인사들에 대한 조사 소식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지난달 6일 본보가 장자연 사건 수사 관련 조서 및 공판 자료 5,048쪽에 대한 분석 기사를 보도하고, 이들 자료를 인터넷에 공개하면서까지 수사기관의 소극적인 대응을 지적했지만 세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재조사를 이끄는 법무부 과거사위원회의 시한인 11월까지 남은 석 달여 동안 당국에 바라는 것은 이제 하나다. 청와대가 4월 장자연 사건 국민 청원에 답하며 ‘공소시효 관계없이 진실을 밝히겠다’고 한 약속의 이행이다. 강요, 성폭행, 협박 등 장자연에 가해졌을 범죄의 공소시효는 대부분 지나버려 법적인 단죄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장씨를 죽게 한 이를 처벌할 수는 없게 됐지만, 유사 사건의 재현을 막기 위해서라도 진실은 드러나야 한다. 1987년 박종철의 비극이 고문을 몰아냈고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이 기초생활보장법 개정을 끌어냈듯이, 장씨의 죽음도 헛되지 않으려면 정부는 주어진 마지막 시간을 가볍게 보내선 안 된다. 다시 세상으로 떠오른 장자연의 죽음을 다루는 언론들에도 무거운 책임이 있다. 재조사 과정에서 하나둘 드러나는 장자연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수사 자료를 보도함에 있어 사실을 왜곡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수년 전 가짜로 판명 난 ‘장자연 편지’들에 언급된 내용을 거론하거나, 심지어 수사 자료에 실린 성추행 장면 묘사를 선정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2009년 2월 25일. 장자연을 대신해 지인이 소속사 대표에 보낸 휴대폰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누가 되었건 간에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지요(2009년 7월 14일 이모씨 성남지청 진술조서).’ 누구라도 나서 망자의 물음에 답할 때다.

양홍주 기획취재부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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