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집에 돈이 많은가?”
대학원 전공을 정하러 지도교수님을 찾아뵈었을 때 처음 받은 질문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직업으로서의 이론물리학자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느꼈다. 그래도 직업 운동가보다는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학부 시절 전공 공부보다 학생운동을 더 열심히 했던 까닭에 사람들은 나의 진로로 이론물리학자보다는 직업 운동가나 현장 활동가를 더 많이 점쳤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현장 활동가, 직업 운동가의 대표적인 인물이 노회찬이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는 비슷한 길을 걸어가던 친구들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돈벌이와 거리가 먼 일을 업으로 삼는 삶은 고달프다. 세상을 바꾸는 사회변혁가의 길은 말해 무엇하랴. 그나마도 매국과 민족 반역행위, 군사반란을 가업으로 일삼았던 자들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손쉽게 누렸던 이 땅에서라면 절망의 강도는 더욱 커진다. 이런 자들을 심판하고 세상을 한 번 바꿔 보겠다는 일을 업으로 삼아 평생을 살기는 정말 어렵다. 그래서 노회찬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혁명가들은 그 절망의 강도를 배가시킨 주범들에게 줄을 서 변절의 길을 택했다. 돌이켜보면 노회찬은 오히려 미래에 변절할 당대의 혁명가들로부터 개량주의자 또는 반혁명주의자라는 비판을 모질게도 받았던 사람이다. 운동이론으로만 따진다면 혁명가들의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운동은 현실이다. 열 명의 혁명가보다 한 명의 현장 활동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노회찬은 그 오랜 세월 묵묵히 현장을 지켜 온 사람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노회찬이 정말로 대단했던 이유는 단지 그가 오랜 세월 그 모진 길을 걸어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여정의 곳곳에서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노회찬이 선도적으로 제기했던 호주제 폐지, 장애인 차별금지, 양심적 병역거부, 노동자의 권익보호 등은 지금 상식이 되었거나 머지않은 미래에 상식이 될 의제들이다. ‘무상’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빨갱이’를 연상하는 나라에서 이제는 누구나 선거 때마다 비슷비슷한 복지정책을 쏟아내게 된 것도 노회찬이 주도한 한국 진보정치가 남긴 큰 유산이다.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커지는 이유는 그 변화를 가로막는 장벽이 너무나 엄청나서 감히 누구도 계란 하나 던져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회찬은 우리 사회의 가장 막강하고 거대한 두 바위, 삼성과 검찰에 맞서 끝없이 자신을 던졌다. 이유는 단 하나. 그게 옳은 일이었으니까. 모두가 알면서도 눈감고 귀 막고 입을 열지 않았던 사실,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의 악습이 되고 우리의 더러운 문화가 됐던 회피와 묵인의 시간, 노회찬은 이 모두에 이의를 제기했다. 삼성도 죄를 지으면 처벌받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법치주의적인 명제가 언젠가 현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작동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 변화의 출발점을 노회찬에게서 찾을 것이다. 노회찬이 그렇게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친 사람들이 결국엔 세상을 바꾼다.” 스티브 잡스가 다시 애플사로 돌아온 직후인 1997년에 나온 광고 문구이다. 노회찬이 십여 년 전 TV 토론회에 나와서 오래된 불판을 갈자고 했을 때, 그때 기준으로 보자면 노회찬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미친 사람’이었다. 언론은 아직도 불판을 갈자 같은 노회찬의 어록에만 관심을 둔다. 타고난 언어의 마술사니, 유머로 정치를 풀어 쓴 여의도의 호빵맨이니 하는 피상적인 평가에만 그친다. 노회찬이 육십 나이에도 언어의 마술을 부릴 수 있는 게 과연 타고난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는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시시각각으로 터지는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는 논평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노회찬이 그만큼 매일매일을 처절하게 살았다는 방증이다. 노회찬은 생애 마지막 날까지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미쳐’ 있었다. 그렇게 미치도록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여의도 정치가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투명인간, 즉 소외계층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남들이 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이 된다. 이런 성품은 시인을 미워하는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숲에 부는 태풍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어지간하면 불법이 되게 만들어 놓고 선별적으로 시혜를 베풀 듯 죄를 사하면 세상을 통치하기 쉬워진다. 거기에다 지금 밝혀지고 있는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가 더해진다. 9년 전 ‘노무현 아방궁’을 노래하던 가락을 지금은 ‘여사님 전용기사’로 바꿔 부르는 언론도 여전하다. 시인의 심성을 터득한 이는 이런 세상에서 온전히 살기 어렵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어도 죽은 시인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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