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동 기획] ‘한국인은 불안하다’
⑨함봉진 서울대암병원 암통합케어센터 교수(한국정신종양학회장)
우리나라 국민은 기대수명인 82세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10명 중 3명 이상(36.2%)이 암에 걸린다. 즉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암을 두려워할 것만은 아니다.
암 진단과 치료 분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암 환자 3명 중 2명 이상이 5년 이상 생존한다. 앞으로 암 생존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만큼 암을 겪은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암이 치료 가능한 병이 되면서 암 치료에 큰 변화가 생겼다. 암 치료과정에서 정신건강의 중요성이다. 과거에는 암 환자의 생존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었다.
암 진단의 충격이나 치료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은 고려하지 않았다. 죽음과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불면, 불안, 우울 등 정신증상은 신체증상 못지 않게 고통을 초래한다. 암 환자의 30~50%가 우울, 불안, 불면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10~20%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자살 위험도 일반 인구보다 2배 이상 높다. 또한 암은 가족 모두의 고통을 동반하는 가족의 병이기도 하다.
불면, 불안, 우울 등 정신증상은 단순히 정신적 고통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신증상은 신체증상을 악화시킨다. 불면, 불안, 우울은 통증, 식욕부진, 구역, 피로 등의 신체증상을 악화시킨다.
우울해지면 치료의지가 약해지고 치료의 순응도가 낮아진다. 이러한 상황들은 암 치료에 지장을 초래하여 생존기간을 짧게 한다. 수면장애와 우울 같은 정신증상이나 만성 스트레스가 면역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암의 진행을 촉진하고 결과적으로 생존기간을 줄인다는 연구결과들도 나오고 있다. 암 치료과정에서 정신건강문제는 환자의 삶의 질뿐 아니라 삶의 양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관리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흔히 수술, 항암, 방사선 치료 등 적극적인 암치료가 끝난 환자들을 암생존자라고 한다. 암생존자의 다수는 암이 치료된 상태로 주기적으로 검사만 받는다. 의학적으로나 남들이 보기에는 더 이상 암환자 아닌 것이다. 이 때가 되면 가정이나 사회에서 건강했던 때의 역할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암생존자 입장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재발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고, 수면이나 기분도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활력도 부족해서 건강했던 때의 역할을 하기 힘들다. 주변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든다.
가족들은 암생존 시기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한 관계가 지속되기도 한다. 따라서 암생존 시기에도 정신증상 조절, 정서적 지지, 가족 상담 등을 적극적으로 제공하여 사회복귀와 적응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
외국의 유수 암센터에서는 암 진단 시기부터 정신건강관리를 포함하는 통합적인 진료를 지향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암환자의 정신건강을 위한 진료와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지만 아직 일부 기관에 국한되어 있다. 국내 실정에 적합한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의료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환자와 가족들은 암환자의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신과 진료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대중의 관심과 정책적 지원도 중요하다.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는 말이 있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삶을 살다가 암과 같은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성숙해지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이러한 회복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도움을 받으면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암과 더불어 살게 된 세상에서 정신건강 관리는 이제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불면, 불안, 우울 등의 정신증상을 감추지 말고 도움을 받아 극복해야 한다. 나 자신의 암 치료와 삶의 질 유지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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