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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이벽의 급서 후 다시 일어난 천주교... 다산은 '익명의 신부'로

입력
2018.07.26 04:40
수정
2018.08.15 20:12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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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 세례 장면.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으나 신도들은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치렀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초기 교회 세례 장면.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으나 신도들은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치렀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이벽을 애도한 박제가의 만사

1785년 7월, 이벽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두 사람이 추도시를 남겼다. 하나는 앞서 소개한 다산이고, 다른 한 사람은 뜻밖에도 박제가다. 박제가는 1778년과 1790년, 1801년 등 4차례에 걸쳐 사신행차를 수행했던 중국통이었다. 그는 ‘북학의’를 지어 나라를 개방 모드로 바꿔야 함을 역설했다. 둘의 교분은 신분과 당색조차 달라 뜻밖이다. 이벽이 서학에 대한 관심을 매개로 박제가에게 먼저 접근했을 것이다.

박제가는 1788년 4월 유금(柳琴)이 세상을 떴을 때, 그를 포함해 평생에 가까웠던 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도시(四悼詩)’를 지었다. 그 중 한 편이 ‘이덕조(李德操)’이다. 덕조는 이벽의 자(字)이다. 이벽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두었다가 세 해를 묵힌 뒤에 썼다. 안 알려진 자료여서 길지만 소개한다.

진인(晉人)은 명리를 숭상하여서

청담으로 그 시대 어지럽혔지.

덕조는 천지 사방 논의했으나

어이 실제에서 벗어났으리.

필부로 시운(時運)에 관심을 두고

파옥(破屋)에서 경제에 뜻을 두었네.

가슴속에 기형(璣衡)을 크게 품으니

사해에 그대 홀로 조예 깊었지.

사물마다 본성을 깨우쳐 주고

형상마다 비례를 밝히었다네.

몽매함이 진실로 열리지 않아

훌륭한 말 그 누가 알아들으랴.

하늘 바람 앵무새에 불어오더니

번드쳐 새장 나갈 계획 세웠지.

살던 곳에 남은 꿈 깨어나서는

푸른 산에 그 지혜를 묻고 말았네.

세월은 잠시도 쉬지 않으니

만물은 떠나가지 않음이 없네.

긴 휘파람 기러기 전송하면서

천지간에 남몰래 눈물 흘리오.

晉人尙名理(진인상명리)

淸譚亂厥世(청담난궐세)

德操議六合(덕조의육합)

何嘗離實際(하상리실제)

匹夫關時運(필부관시운)

破屋志經濟(파옥지경제)

胸中大璣衡(흉중대기형)

四海一孤詣(사해일고예)

物物喩性體(물물유성체)

形形明比例(형형명비례)

鴻荒諒未開(홍황량미개)

名言孰相契(명언숙상계)

天風吹鸚鵡(천풍취앵무)

翻成出籠計(번성출농계)

蘧廬罷殘夢(거려파잔몽)

靑山葬靈慧(청산장령혜)

春秋不暫停(춘추불잠정)

万化無非逝(만화무비서)

高歗送飛鴻(고소송비홍)

乾坤暗雙涕(건곤암쌍체)

메아리가 없었다

앞의 10구는 이벽의 학문적 성취를 말했다. 진인(晉人)의 청담은 세상의 명실을 혼란케 했지만, 이벽이 육합(六合), 즉 동서남북상하의 천지 이치를 논했던 일은 실제에 바탕을 둔 실다운 공부였다. 그는 세상의 변화(時運)를 앞서 읽고 가슴 속에는 서학의 큰 포부를 품었다. 특별히 사물마다 지닌 성체(性體)와 각 형상의 비례(比例)를 환하게 밝힌 것은 그가 거둔 가장 큰 성과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그의 깨달음에 화답하는 메아리가 전혀 없었다.

박제가의 시문집 '정유각집'에 실린 이벽 추모시.
박제가의 시문집 '정유각집'에 실린 이벽 추모시.

제 11구에서 천풍(天風)이 앵무새에게 불어와, 앵무새가 새장을 뛰쳐나갈 계획을 세웠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제껏 그는 새장에 갇힌 앵무새였다. 앵무새는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고도 말 흉내나 내며 귀한 대접을 받지만 자유가 없다. 그런 그가 천풍, 즉 하늘 바람을 쐬고 나서 자신이 누려온 새장 안의 기림을 다 내던지고 바깥으로 훨훨 날아갈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잔몽에서 깨어난 그는 그만 그 신령스런 지혜(靈慧)를 청산 속에 묻고 말았다.

15구에서 18구까지의 네 구절은 이렇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모두 죽는다. 저 하늘 어둠 속으로 날아간 큰 고니 같은 그대를 전송하며, 나는 남몰래 두 줄기 눈물을 흘린다. 시 속의 천풍(天風)은 말 그대로 천주학의 바람이었을 것인데, 워낙 예민한 시점이어서 박제가는 모호하게 뭉뚱그려 이벽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시로 보아 두 사람은 속내를 터놓고 대화를 나누던 사이로 보인다.

정중동의 교회 재건

이벽의 급서로 중심이 와해된 조선 천주교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1786년 봄의 일이다. 1년이 지나는 사이, 집안의 감시망이 느슨해졌고, 서학에 대한 반대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이기양이 다짜고짜 안정복을 찾아가 일격을 가한 것도 효과가 있었다. 다산 형제도 권일신, 이승훈 등과 회동하여 교회 재건을 위한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을 개시했다.

다산이 천주교 활동에 한참 열을 올렸던 1785년과 1786년, 그리고 26세가 되던 1787년 3년간 ‘사암연보’의 기사를 보면 성균관 유생으로 각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내용 밖에 없다. 천주교 관련 사실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연보 속의 그는 공부 밖에 모르던,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거둬 정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모범적인 수험생일 뿐이었다. 추조 적발 사건은 물론, 이벽의 죽음조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1979년 6월 24일 봉헌된 이벽 추모미사. 이벽의 본명축일인 세자 요한 축일대미사로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의 공동집전으로 치러졌다.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1979년 6월 24일 봉헌된 이벽 추모미사. 이벽의 본명축일인 세자 요한 축일대미사로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의 공동집전으로 치러졌다.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1979년 6월 21일 경기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공동묘지 터에서 진행된 이벽 묘소 발굴 작업 당시 발견된 지석.
1979년 6월 21일 경기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공동묘지 터에서 진행된 이벽 묘소 발굴 작업 당시 발견된 지석.

1789년 말에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의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고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의하려고 1786년 봄에 모임을 가졌습니다. 갑은 을에게, 을은 병에게 고해를 할 수 있지만, 갑과 을이 서로, 혹은 을과 병이 서로 맞고해를 하는 일은 없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같은 해 가을에 다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미사를 집전하고 견진성사를 주는 일을 제가 맡아 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다른 열 명에게도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신자들끼리 맞물려 돌아가며 고해성사를 행했다.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에서 본대로 흉내를 낸 것인데, 나름의 규칙은 분명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누군가에게 고백하여 그 잘못을 용서 받는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사 전례와 성사 시행 이후 교인의 숫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가성직 제도와 10명의 신부

그들은 이승훈을 교회의 책임자로 세워 이벽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이승훈은 미사 전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1786년 가을에는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면서 각 지역의 신자들을 관리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역할을 담당할 10명의 신부(神父)를 이승훈이 직접 임명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인 없이 자기들끼리 임의로 신부를 임명하면서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를 교회사 용어로는 ‘가성직(假聖職) 제도’라 하는데, 이때 가(假)는 ‘가짜’가 아닌 ‘임시’의 뜻이다.

확실히 조선의 천주교회는 그 출범부터 달리 유례가 없을 만큼 기이했다. 가톨릭의 역사에서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에 자기들끼리 교리책을 공부해서 영세 주고 신부를 임명해 미사까지 봉헌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중국 교구는 조선에서 막 태동한, 이 서툴지만 열성에 넘치는 이 공동체를 경이에 차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10인의 명단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주교로 지명되고,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꼬 곤자가, 유항검 아우구스띠노, 최창현 요한,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지역에서 설교하고 영세를 주고, 견진성사를 행했다. 신자끼리 행하던 고백성사는 이후 사제가 전담하게 되었다.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하게 하는 등 신부로서의 직임을 각 지역에서 개시하였다.

미사를 준비하는 신도들의 열성도 대단했다. 이들은 화려한 중국제 비단으로 미사 집례 때 신부가 입을 제의(祭衣)를 지어 입히고, 정성껏 미사에 임했다. 1786년 가을, 신부를 결정하던 모임에는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형제가 참여했다. 임명한 신부가 10명이라 했는데, 확인된 명단은 권일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 5인뿐이다. 별도의 기록에 홍낙민과 최 야고보가 더 보인다.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3명은 누구일까? 적어도 이 중 두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이다. 두 사람은 조선 교회의 출범 당시부터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어째서 빠졌을까? 달레가 애초에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이 기록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은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자기 형제의 실명을 빼고 ‘그 밖의 여러 사람’ 속에 숨어버렸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은 이승훈이 임명한 10명의 신부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다산은 신부였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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