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봉일 아침이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배우들과 함께 (종로) 서울극장이나 피카디리극장 앞 2층 카페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매표소 앞에 줄이 길게 서면 흥행을 직감하며 악수를 나누고 박수를 쳤어요. 매표소 앞이 한산하면 배우와 서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바로 뜨곤 했습니다.”
국내 한 중견 영화 제작자가 들려준 이야기다. 적지 않은 영화인들이 비슷한 말을 하곤 한다. 극장들이 각자의 이름을 내걸고 관객들을 불러모으던 시절에 대한 회고다.
1990년 후반까지만 해도 국내외 화제작들은 서울 종로3가 주변 서울극장이나 피카디리극장, 단성사 위주로 개봉했다. 충무로 대한극장 스카라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도 서울 도심 주요 극장으로 꼽혔으나 종로3가의 주변으로 여겨지곤 했다. 최신 화제작을 보려면 서울 어디에 살든 종로나 충무로 주변으로 극장 나들이를 해야 만 했다. 동네극장도 있었으나 그저 그런 무술영화 또는 에로영화를 상영하거나 중심부 극장에서 개봉한 지 오래된 인기 영화를 재개봉 하기 일쑤였다. 1993년 개봉한 국민영화 ‘서편제’는 단성사에서만 6개월 동안 상영되며 113만명을 동원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지금은 잊혀진, 단관 극장 시절의 풍경이다.
1998년 4월 서울 광진구 한 대형 전자제품 쇼핑몰에서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CGV강변이 들어서면서부터다. CGV강변은 1995년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등과 손잡으며 대중문화산업에 뛰어든 제일제당(CJ의 전신)의 야심작이었다. 멀티플렉스는 한 곳에 여러 상영관을 품고 있으니 관객이 다종다양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고, 낡은 단관 극장보다 쾌적하고 안락했다. 새로운 형태의 극장에 관객들이 몰렸다. 제일제당은 CGV강변을 필두로 멀티플렉스 체인 구축에 들어갔다. 롯데그룹이 계열사 백화점을 기반으로 멀티플렉스 사업에 나섰고, 오리온그룹은 삼성동 코엑스에 대형 멀티플렉스를 지으며 경쟁에 뛰어들었다. 멀티플렉스는 순식간에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됐다. 전국 주요 도시 중심부에 자리잡더니 동네까지 파고들었다.
단관 극장이 국도라면, 멀티플렉스는 고속도로다. 멀티플렉스가 대세로 자리잡으며 전국의 영화팬들이 최신작들을 동시에 빠르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영화 유통 환경이 혁명적으로 개선되면서 관객은 급격히 늘었다. 2002년 1억1,000만 명이 극장을 찾으며 1억 관객시대를 열었고, 11년 후인 2013년 2억 관객 고지를 넘었다. 멀티플렉스는 한국영화 산업화의 토대라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해 기준 전국 멀티플렉스는 356개다.
빛이 강하니 그림자가 짙다. 멀티플렉스 등장으로 영화 다양성이 훼손됐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멀티플렉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충무로 대작 영화에 대한 쏠림 현상이 강해도 너무 강하다. 같은 회사라도 개별 멀티플렉스끼리 실적 경쟁을 한다. 멀티플렉스 점장들은 상업성 짙은 영화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저예산 영화, 예술영화는 아무래도 뒷전이다. 몇 년 전 경기 성남시 한 멀티플렉스는 할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만 하루 종일 상영한 적이 있고 이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스크린은 많은데 정작 골라보는 재미는 사라지고 있다. 멀티플렉스 시대의 기현상이다.
CGV는 최근 CGV강변 개관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해외 시장 공략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가상현실(VR) 등 특화된 영화 상영 형태도 선보이겠다고 했다. 20년 만에 세계 5위 극장사업자가 된 CGV에 박수보다 고언을 하고 싶다. 극장 사업에도 첨단과 글로벌은 중요하다. 하지만 멀티플렉스라는 그릇에 담기는 음식도 중요하지 않을까. 편식은 몸에 좋지 않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다양해야 진화한다. 멀티플렉스에서 어떤 영화를 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으면 좋겠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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