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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웃음과 유머의 정치인

입력
2018.07.2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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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불타는 욕정의 눈빛을 보여준 여인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태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그 여인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내 육체는 여인들이 좋아할 타입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들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나처럼 작고 뚱뚱한 사람보다는 어깨가 넓고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 말이다. 잘 생긴 거야 그렇다고 쳐도 여전히 넓은 어깨와 큰 키를 선호하는 성향은 참으로 유감이고 안타깝다. 지금은 수렵채집 시대가 아니지 않는가. 여전히 구석기 시대 남성상을 갖고 있는 21세기 여성이라니…

이런 내 생각은 순전히 오해였다. 진화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단기적인 짝이 아니라 장기적인 배우자를 선택하려는 여인들에게 중요한 기준은 따로 있다. 여인들은 건장한 남자보다는 이타적인 성향이 강한 남자를 장기적인 배우자로 선호한다. 그렇다면 이타적인 성향이 있는지 어떻게 알까? 친절하고 이해심이 넓은 성격이 바로미터다. 친절함은 넉넉한 자원, 자원을 제공하려는 마음, 좋은 성격,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목록을 가지고 다니면서 이런 사항을 세세하게 따지고 점수를 매길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모든 요소들은 한꺼번에 드러난다. 유머가 바로 그것. 장기적인 배우자를 찾을 때 여인들은 유머를 잘 구사하는 남자를 선호한다. 여인들이 배우자의 유머를 중요시 하는 이유에 대해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는 유머는 좋은 유전자를 가진 표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머 자체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머를 구사하려면 창의적이고 머리 회전이 뛰어나야 한다. 따라서 ‘지금 내 앞에서 구사하고 있는 유머를 보니 확실히 우월한 유전자와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라고 판단한다는 이야기다.

여인 앞에서 유머를 구사하는 것은 마치 수컷 공작새가 암컷 앞에서 화려한 꼬리 윗덮깃을 활짝 펴서 자랑하는 것과 같다. 화려한 꼬리 윗덮깃은 포식자의 눈에 잘 띄어 생존에 불리한 요소다. 하지만 암컷 앞에서는 “나는 건강해. 내 유전자는 탁월해”라는 광고판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런 화려한 장식이 공작새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작처럼 유난스럽지만 않을 뿐이지 다른 수컷 새들도 가지고 있다. 아마 공룡에게도 비슷한 장치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날개와 화려한 깃털이 없는 대신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는 능력이 있다. 웃기고 웃을 수 있다. 웃음은 오래 살아남아서 많은 자손을 남기는 데 효과적인 도구다. 따라서 유머와 웃음은 자연선택으로 잘 다듬어진 생물학적 적응인 셈이다.

인간은 다양한 수준에서 짝을 짓고 배우자를 선택한다. 친구를 사귀고 동아리에 가입하고 직원을 뽑고 사업 파트너를 결정한다. 이때도 유머는 중요한 기준이다. 친절한 동료와 명랑한 직장 분위기는 내가 얻을 수 있는 자원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지 알려준다. 내가 그 집단에 남기 위해서 얼마나 기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 역시 나온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을 대변할 정치가와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누구를 선택할까? 이때도 단기적인 짝과 장기적인 배우자 선택 전략은 다르다. 단기적으로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거친 투쟁가가 좋다. 바쁜 나를 대신해서 열렬히 싸워줄 사람 말이다. 하지만 한두 해가 아니라 10년 20년이 걸릴 긴 싸움에서는 다르다. 창의성과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을 선택한다. 그가 누군지 어떻게 아는가? 정치에서도 역시 유머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아닐까.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옆에서 굶고 있는데 암소 갈비 뜯어도 됩니까? 암소 갈비 뜯는 사람들 불고기 먹어라 이거에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 라면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랑 일본이랑 사이가 안 좋아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소할 땐 청소해야지, 청소하는 게 ‘먼지에 대한 보복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까?”

호빵맨 고 노회찬의 말이다. 그는 언제나 현장에 있었다. 함께 고통 받고 멸시 당했다. 하지만 그는 거친 싸움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릴 때 그는 유머로 싸웠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고 재밌게 말했다. 하루 이틀의 싸움이 아니라 10년 20년의 싸움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여인이 유머를 잘하는 남자를 선호하듯, 시민들도 유머가 좋은 정치인 노회찬을 선택했다. 정파가 다르더라도 그를 신뢰하고 사랑했다. 한때 내게 불타는 눈빛을 보여주었던 여인도 요즘은 시들하다.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수준을 끌어올린 정치가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쉽게 식지 않을 것이다. 노동운동가 노회찬, 진보정치인 노회찬, 그리고 유머와 웃음의 사나이 노회찬은 우리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웃는 낯으로. 그대 잘 가라. 꽃가마 타고.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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