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단식ㆍ고공농성ㆍ법정다툼에 죽음까지… 12년 만에 눈물의 복직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단식ㆍ고공농성ㆍ법정다툼에 죽음까지… 12년 만에 눈물의 복직

입력
2018.07.22 20:00
수정
2018.07.22 23:13
3면
0 0

20대에 해고돼 이젠 30대 훌쩍

투쟁복 습관적 꺼내다 피식 웃음

“정부ㆍ국회도 다 안된다고 했는데…

버티고 버텨 결국 이런 날 왔다”

“부조리에 맞선 엄마로 기억되길”

철도노사가 KTX 해고 승무원 복직을 합의한 21일 13년째 투쟁을 이어온 KTX 해고 승무원들이 서울역 플랫폼 중앙계단에서 투쟁 해단식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8.7.21 연합뉴스
철도노사가 KTX 해고 승무원 복직을 합의한 21일 13년째 투쟁을 이어온 KTX 해고 승무원들이 서울역 플랫폼 중앙계단에서 투쟁 해단식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8.7.21 연합뉴스

“정부도 국회도 사법부도 다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런 날이 왔네요.”

“오늘 아침에도 투쟁복을 꺼내려다 ‘아, 끝났지’ 했죠, 사원증이 나와야 실감이 날 것 같아요.”

22일 아침은 전날까지 포함해 지난 4,526일과는 달랐다. 오미선(39) 김영선(37)씨는 한결같이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20대 초반 투쟁을 시작한 이들은 어느덧 중년이 됐다. 해고 노동자라는, 그 지긋지긋한 꼬리표를 떼고 마침내 복직을 약속 받는 데 12년이 걸렸으니 그 회한이 오죽할까. 그들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도 어쩌면 실감이 안 날 것 같은 새날이 왔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와 전국철도노동조합이 2006년 해고된 KTX 승무원의 복직에 전격 합의한 21일. 서울역 농성장에서 기자회견을 준비하던 김영선씨에게 두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이겼다면서, 끝났다면서.” 김씨가 “네 저희 마무리할 것 같아요”라고 답하자 두 할머니가 자초지종을 밝혔다. “항상 이 길을 지나다니면서 이렇게 더운데 아직도 고생을 하고 있는 게 마음이 아팠는데, 방금 밥을 먹으면서 식당에서 이겼다는 뉴스를 보다가 너무 기뻐서 축하해 주려고 일부러 찾아왔어. 축하해!” 김씨는 “또 막 너무 눈물이 났다”고 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KTX해고승무원 복직일지 송정근 기자 /2018-07-22(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KTX해고승무원 복직일지 송정근 기자 /2018-07-22(한국일보)

김씨는 복직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프리랜서로 일해왔다. “투쟁하면서 다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다 보니까 투쟁 초반 3년처럼 싸우지는 못했죠. 다들 복직하는 날을 꿈꾸며 프리랜서로 일했고 나 역시도 프리랜서 웨딩플래너로 일했어요.” 복직이 결정되면 언제든지 원래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그는 “누군가 지금 하는 일과 KTX 승무원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동료들 대부분은 ‘KTX 승무원’이라고 답한다”며 “KTX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12년 넘게 버틴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미선씨는 너무 정신 없어서 21일은 그냥 지나갔다고 고백했다. 다음날인 22일 피식 웃었고 허탈한 기분에 이어 만감이 교차했다. “습관적으로 투쟁복을 꺼냈죠. 또 농성장에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함께 투쟁하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가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가 자라서 ‘엄마가 돈에 허덕이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위해 싸웠다고’,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울먹이던 오씨 목소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30대를 투쟁으로 다 보내서 걱정이 없을 수 없죠. 그래도 어쨌든 일할 수 있는 한 사람의 국민이 돼서 너무 기뻐요. 앞으로 해결할 부분을 위해 계속 또 싸울 거에요.”

두 사람뿐 아니라 이번에 복직을 약속 받은 KTX 해고 승무원 180명은 눈물의 12년을 악착같이 버티어왔다. 빨갱이라고 매도 당하고, 동료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걸 지켜보고, 각자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희망의 끈을 잃지 않은 건 끈끈한 동료애와 연대의 힘이다. 김영선씨는 “나 하나가 무너지면 그것이 주변 동료들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주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견뎠고 버텼다”고 했다.

그만큼 그들이 건너온 12년은 신산의 세월이었다.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는 주목을 받으며 2004, 2005년 엄청난 경쟁률을 뚫은 KTX 승무원 300여명은 코레일의 ‘2년 내 정규직 고용’ 약속을 받고 입사했다. 그러나 매년 위탁업체(홍익회→한국철도유통→KTX관광레저)만 바뀔 뿐, 고용 형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2006년 3월 1일부터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코레일을 상대로 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코레일은 사측이 자회사 KTX관광레저(현 코레일관광개발)로 이적을 거부한 승무원 290명을 그 해 5월 21일, 정리해고했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단식농성과 삭발투쟁, 쇠사슬로 몸을 묶은 연좌농성에, 서울역 뒤편 40m 높이 조명 철탑에 오르는 20여일간의 고공농성까지 하며 직접 고용을 요구했다.

2008년 11월 이 가운데 34명이 코레일에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냈다. 이들은 1ㆍ2심에서 연이어 승소해 4년간의 임금 8,640만원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15년 2월 대법원은 코레일과 KTX 승무원 사이 직접적인 근로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밀린 급여를 지급받았던 승무원들은 이자를 포함해 각자 1억원이 넘는 돈을 코레일에 되돌려줘야 했고 이를 비관한 한 승무원은 세 살배기를 남겨둔 채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3년, 법원행정처가 ‘양승태 사법부’ 시절 작성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 의혹 문건에 KTX 승무원 판결이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반전의 계기,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됐다.

갈 길은 남아있다. 정미정(37) KTX열차승무지부 상황실장은 “실제로는 직접 고용이 아닌 특별채용 형식이라 아직 ‘절반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라며 “복직 이후에도 이 부분을 해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