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건국 충격 속 부패 왕정 뒤엎은 군사혁명
수에즈 운하 국유화ㆍ아랍 공화국 건국으로 아랍민족주의 전성기
나세르 사후 이집트는 친미국가로 변신… 아랍 맹주 자리도 내려놔

1952년 7월23일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와 무하메드 나기브(1901~1984)가 이끄는 이집트의 민족주의 성향 장교모임인 자유장교단이 친영(親英) 파루크 국왕 퇴위를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집트는 1차 대전 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영국군은 중동의 원유수송로인 수에즈 운하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이집트의 핵심 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과 결탁한 왕실, 귀족, 대지주 등 지배층의 사치와 부패도 극에 달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막기 위한 1차 중동전쟁(1948년)에서의 패배는 청년장교ㆍ언론인ㆍ교사 등 성장하는 이집트 중산계급에게 국왕과 귀족이 지배하는 구질서 타파와 아랍민족통합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켰다. ‘부패한 군대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국익을 해친 반역자들을 이집트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는 자유장교단의 혁명공약에 이집트 국민들이 절대 지지를 보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쿠데타 성공으로 왕정이 타파되면서 연장자인 나기브가 이듬해 이집트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혁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나세르가 곧 실권을 장악하면서 2대 대통령에 오른다. 그는 대통령 취임 뒤 이집트 민중의 숙원이던 영국군의 수에즈 운하 철군 요구를 관철시키고 전격적으로 국유화를 단행했다. 또 ▦범아랍민족 통합 ▦미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적극적 중립주의 ▦국가기간 사업국유화ㆍ농업근대화 등을 기조로 하는 ‘나세르주의’는 이웃 국가들의 신흥계급ㆍ지식인들에게 들불처럼 확산됐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리비아 등에서도 왕정을 무너뜨리는 반제ㆍ반봉격 성격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며 5ㆍ16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회고록에서 나세르를 자주 언급하는 등 그의 급진적 민족주의는 1950~1960년대 구 식민지 국가의 젊은 엘리트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쳤다.
영국ㆍ프랑스ㆍ이스라엘을 몰아낸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의 정치적 승리와 1958년 이집트ㆍ시리아가 합병해 탄생한 아랍연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나세르는 아랍세계의 통합을 이끌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확보했으나, 6일 전쟁 참패(1967년)로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한다.
1970년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서하자 역시 자유장교단 출신의 안와르 사다트(1918~1981)가 대통령에 취임하지만, 그는 이집트의 오랜 후원자였던 소련을 버리고 미국과 손을 잡았다. 아랍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해 화해를 꾀하면서 나세르식 범아랍주의는 공식폐기 된다. 극단적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된 사다트를 이어받은 호스니 무바라크(90) 전 대통령 역시 친미ㆍ친 이스라엘 노선을 견지했으며, 2011년 ‘아랍의 봄’의 민주화 바람을 진압하며 등장한 현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 역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친 이스라엘 행보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일본의 중동전문 저널리스트 후지무라 신(藤村信)은 나세르를 “인종(忍從)과 침묵의 운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아랍세계의 민중을 오랜 잠으로부터 깨우고 유럽 식민주의의 유산을 일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하나된 아랍세계’라는 나세르의 열망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이제 한 때의 백일몽이 되고 있다.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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