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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성 햇수 안 붙인 위스키… 술집 메뉴엔 버젓이 ‘17년산’

입력
2018.07.28 09:0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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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표시 정보는 깜깜한데

할인마트ㆍ술집선 불티나게 팔려

골든블루ㆍ더블유 아이스 등

작년 톱 5 중 3종이 ‘무연산’

“고품질인 양 기만하고 폭리” 지적

원액 숙성 나이를 밝히지 않아 몇 년 산인지도 알 수 없는 무연산 위스키들이 술집 메뉴판에는 ‘12년’ ‘17년’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른 위스키들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사진 독자 제공, 그래픽 신동준 기자
원액 숙성 나이를 밝히지 않아 몇 년 산인지도 알 수 없는 무연산 위스키들이 술집 메뉴판에는 ‘12년’ ‘17년’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른 위스키들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사진 독자 제공, 그래픽 신동준 기자

회사원 차모(44)씨는 최근 대학 동기들과 함께 바(Bar)를 찾았다가 위스키에 적힌 숫자 ‘17’ 때문에 직원과 실랑이를 벌였다. 분명 가게 입구에 ‘위스키 17Y-골든블루 다이아몬드/윈저/스카치블루/임페리얼’이라 적힌 광고판이 있었고, 가장 큰 글씨로 적힌 골든블루를 주문했지만 정작 병 어디에도 17이라는 숫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직원에게 ‘17년산이 맞냐’고 묻자 ‘17년산급’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전 세계 어디서나 12년산 이상의 위스키는 틀림없이 병에 숫자가 적혀 있다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재차 묻자, 직원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얼버무렸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게 있었다. 17년산인지도 정확하지 않은데 메뉴판의 가격은 다른 17년산 위스키들과 같았다. 이건 또 어떻게 된 것이냐고 따졌더니 돌아온 답은 ‘(위스키) 회사에서 출고 가격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차씨는 17년산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위스키를 다른 17년산 위스키와 똑같은 가격을 받고 팔겠다는 생각을 한 위스키 회사나 바 모두에 화가 났다. 소비자를 봉으로 아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최근 국내 위스키 시장에선 원액 숙성햇수(나이)가 적혀 있지 않은, 이른바 ‘무연산(無年産ㆍNo Age Statement)’ 위스키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해 국내 위스키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위스키 골든블루 사피루스를 비롯해 3위 더블유 아이스(디아지오코리아), 4위 다이아몬드(골든블루) 역시 햇수 표시가 없다.

위스키의 나이는 원액의 숙성 햇수에 따라 결정된다. 원액은 통나무 안에서 숙성한 시간만큼 나이를 먹는다. ‘3년산=3년 숙성’ 식이다. 그리고 스카치위스키 법령에 따라 하나의 위스키에는 나이가 서로 다른 여러 원액이 섞여 있고(블렌딩), 이 중 가장 어린 원액 나이가 그 위스키의 나이가 된다. 예를 들어 3년산 원액, 5년산 원액이 섞인 위스키는 '3년산 위스키'가 된다. 12년산은 가장 어린 원액이 12년 됐다는 뜻이 된다.

일반적으로 원액이 더 숙성될수록 맛과 향이 좋기 때문에 나이를 가리키는 숫자가 크면 가격이 올라간다. 위스키 소비자들은 국적 불문하고 위스키 표식 나이에 의존해 제품을 고르기 마련. 위스키 회사로서는 더 숙성된 원액을 쓸수록 가격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원액 확보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비싼 술값에 대한 부담 줄이려 무연산 위스키 등장

업계 관계자는 무연산 위스키의 등장 배경에 대해 “기존 위스키 가격을 부담스러워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가격을 낮춘 새 위스키가 필요했다”며 “더구나 숙성된 원액이 부족하자 회사들이 덜 숙성된 원액을 이용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럴진대 나이 표시가 없는 위스키와 표시가 있는 위스키의 가격이 사실상 똑같다. 무연산 골든블루 사피루스 출고가는 2만6,334원으로 판매율 2위를 기록한 연산 위스키 윈저 12년(디아지오)의 2만6,367원과 백 원 단위까지 같다. 골든블루 다이아몬드도 4만62원으로 임페리얼 17년(4만7원)과 55원 차이가 날 뿐이다.

할인마트 진열대에도 술집 메뉴판에도 원액 나이 표기와 관계없이 같은 가격표를 달고 있으니 소비자들은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고 같은 수준의 제품으로 여긴다.

무연산 위스키 제조 회사들은 나이 표시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덜 좋은 위스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위스키 품질은 원액뿐 아니라 좋은 보리 사용, 통나무통 품질, 증류 기술, 블렌딩 노하우 등 여러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이다. 업계 관계자는 또 “가치가 없는 제품이라면 이미 사라졌을 테지만 소비자들이 계속 찾는 것은 품질이 입증됐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위스키에 왜 숫자가 없는지 모르는 소비자들

중요한 점은 위스키의 숫자에 숨겨진 사연을 정확히 알고 있는 소비자가 얼마나 될 것이며, 이걸 알고도 연산 위스키와 똑같은 가격표가 붙은 무연산 위스키를 선택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민생경제연구소와 술사랑동호회 등이 무연산 위스키들이 소비자를 속이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구소 관계자는 “숙성 연도, 연산이 매우 중요함에도 무연산 위스키를 고품질 위스키인 양 판매하고 홍보까지 하면서 소비자를 기만하고 폭리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때문에 소비자들이 제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한 뒤 선택할 수 있도록 제조 회사들이 위스키의 숙성 나이(연산)를 분명히 밝히고, 무연산이면 제품 라벨에 무연산을 분명히 표기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요구다.

박상준기자 butt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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