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전문 통번역가 이단비씨
통역 알바로 공연계 입문한 이후
번역ㆍ코디ㆍ조연출 등 팔방미인
‘웃는 남자’ ‘마리앙트와네트’ 등
최근 선보인 대형 창작 뮤지컬서
드라마투르그로 맹활약
국내 ‘댄스 뮤지컬’이란 장르를 알린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부터 천재 연출가 조르주 르파주의 출세작 ‘바늘과 아편’, 최근 개막한 초대형 창작 뮤지컬 ‘웃는 남자’까지 공연계 떠들썩한 작품은 모두 이 사람의 손과 입을 거쳤다. 공연 전문 통번역가 이단비(40)씨다. 독일어와 영어를 현지인처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씨는 통역과 코디네이터, 자막 및 희곡 번역가로 이름을 먼저 알렸고, 2011년부터 극단 고래의 단원으로도 활동하며 조연출로도 데뷔했다. 최근 개막한 ‘웃는 남자’를 비롯해 ‘마리앙트와네트’, ‘마타하리’ 등 초대형 창작 뮤지컬의 드라마투르그로도 활약하고 있다.
16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이씨는 “우연한 기회에 통역을 하면서 공연계 발을 들였지만 요즘은 통역보다 드라마투르그와 번역에 더 집중한다”고 말했다. “조연출이 연출가의 조수라면 드라마투르그는 연출가의 조언자에 가까워요. 초연하는 창작 작품이든 잘 알려진 고전이든 대본이 공연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 관계를 읽어주는 사람이죠. 독일에서 시작됐는데 최근에는 국내 뮤지컬, 오페라 제작까지 드라마투르그를 두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이씨가 공연계에 “우연히 발을 들인” 계기는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들어온 통역 아르바이트였다. 2004년 줄타기 명인 김대균의 해외 공연 인솔과 통역을 맡았고, 이듬해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2005) 통역과 만하임 국립극장의 ‘오델로’ 국내 초청 공연(2055) 통역과 코디네이션을 맡았다. “한복 입고 줄 아래 서서 김대균 명인이 하는 사설을 영어로 통역했거든요. 2006년 독일 여성이 김금화 만신께 내림굿 받으러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새벽 6시 인왕산에서 만나 2박 3일을 통역했죠. 통역이 아니면 언제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겠어요. 새로운 경험을 확장시키고 편견을 없애는 통역 일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죠.”
“알음알음으로 일이 들어오는 공연계”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연극 관련 자료를 봐왔던 이씨는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고, 얼마 안 가 공연 전문 통역사로 입소문을 탔다. 대학원에서 영미 희곡을 전공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공연 관련 통역을 맡으며 “현장과 학문의 간극을 메우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꿈으로 바뀌었다. 때마침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되면서 극단 백수광부의 ‘여행’이 독일 무대에 올랐고, 이씨는 극단의 통역 겸 기획자로 참가했다. “그때 친해진 배우 중 한 명이 이해성씨였는데, 2011년 극단 고래를 창단하면서 단원을 제안했죠.” 대학 시절 연극 ‘맥베드’의 마녀 역할을 하면서 “선배들의 엄청난 웃음소리가 내내 기억에 남아 ‘연기는 내 길이 아니다’라고 확신”했던 이씨는 드라마투르그로 입단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롤모델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씨가 내놓은 대답은 “아버지”. ‘베르톨트 브레히트 전문가’로 통하는 이재진 전 단국대 독문과 교수다. 브레히트를 비롯한 독일 희곡을 가르쳤던 아버지 이씨는 젊은 시절 극단 ‘프라이에 뷔네’, ‘우리극장’을 운영하며 연출가로도 활동한 바 있다. “독문학을 전공한 아버지와는 다른 일을 하고 싶어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딸 이씨는 “어렸을 때 연극보다 무용이나 음악극을 더 좋아했는데 어느 새 보니 연극 관련 통번역을 더 많이 하고 있더라”고 멋쩍게 웃었다. 그는 2007년 젊은 시절 아버지가 번역했던 뷔히너의 희곡 ‘보이체크’을 국내 제작사가 뮤지컬로 만드는 과정에서 희곡 번역을 담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연은 무산됐지만, 이 작품은 이후 이씨의 뮤지컬 드라마투르그 길을 열어주었다.
이씨는 9월 극단 프라이에 뷔네 창단 50주년 기념 특별 공연에 참여한다. 아버지 이재진 연출을 비롯해 양정웅 연출가의 어머니인 극작가 김청조 등 단원들의 대표작을 갈라 형식으로 선보이고, 극단 50년사를 정리한 세미나도 곁들인다. “아버지께서 평소 ‘외국 작품을 번역하려면 한국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희곡을 제대로 옮기려면 무대를 알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요. 대본 번역을 하면서, 그 말씀이 중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있죠.”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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