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대표적인 게 국방비 착복으로 9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1951년의 국민방위군 사건과 이승만 재선을 위한 부산정치파동(1952.5), 재선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1952년 3~7월의 이른바 ‘중석불 사건’이다.
중석불(重石弗)이란 중석(텅스텐)을 수출해서 번 달러라는 의미로, 외화가 귀하던 당시 종교불(기독교 선교ㆍ구호자금) 원조불(차관 달러) 같은 말과 함께 통용됐다. 중금속 텅스텐은 녹는 점이 높아 포신 등 무기 재료로 귀하게 쓰이던 금속. 미국은 텅스텐 주요 조달국이던 중국이 공산화하자 52년 3월 한국과 협정을 체결, 2년간 1만5,000톤을 수입하는 조건으로 350만달러를 선금으로 건넸다. 그해 국영기업 ‘대한중석’이 설립됐고, 전시 이승만 정부는 그 돈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외화는 산업자재 수입에만 쓸 수 있도록 제한돼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규정을 바꿔 대통령이 인가하면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재무부는 그 달러를 14개 무역회사에 당시 환시세(1만2,000대 1)의 반값(6,000대 1)에 불하,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도록 했다. 거기다 정부 보유불 120만달러도 얹어 10개 기업에 불하했다. 산업을 키우려면 중석을 캐야 하고, 중석을 캐려면 광부들이 잘 먹어야 한다는 게 당시 재무부의 명분이었다. 무역상들은 수입 밀가루와 비료를 규정가보다 3~4배 비싸게 시중에 유통시켜, 환차익에 더해 최대 5배의 폭리를 취했다. 그 수익 중 얼마가 이승만 정부의 정치자금으로 흡수됐는지는 알 수 없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야당은 1952년 7월 18일 국회 특별조사단을 꾸려 진상 조사에 나섰다. 조사단은 업자들이 환차익으로 505억원, 가격 조작으로 265억원 등 최소 770억원의 부당 이득을 챙겼다고 밝혔고, 당시 법무부는 상사 대표 등 관련자들을 군정법(폭리취체령)과 양곡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들은 전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사태 책임은 농산부가 떠맡아 장ㆍ차관과 양곡국장이 경질됐고, 정작 기획을 주도한 재무부 장관(백두진)은 이듬해 국무총리가 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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