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버마)의 7월 19일은 국가 공휴일인 ‘순교자의 날(Azani nei)’이다. 독립 연방국가 수립을 앞둔 1947년 그날, 미얀마 독립과 민주주의의 지도자이자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Aung San)이 암살당했다.
영국 식민지(1886~1948) 미얀마는 1937년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해 영연방 자치령으로 지내다 2차대전기 3년 남짓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전후인 1947년 1월 협상을 통해 완전 독립을 보장받았다. 영국 노동당 정부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수상과 런던서 담판을 벌여 연내 독립 보장 협정서를 받아낸 게 당시 버마 최대 저항독립운동 단체였던 반파시스트인민자유동맹(AFPFL)의 리더 아웅산이었다. 정부 수립을 위한 첫 총선인 1947년 4월 선거에서 AFPFL이 압승하면서 아웅산은 실질적 총리로서 6명의 각료와 함께 독립정부 수립을 추진 중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이념과 종교, 종족으로 나뉜 미얀마의 운명은 분열로 치달았고, 급기야 다수 종교인 불교를 앞세운 군부독재(1962~2015)의 길고 어두운 현대사를 낳았다.
아웅산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반영운동을 하다 처형됐고, 아버지는 변호사로 역시 저항운동을 거들었다. 아웅산은 랑군(Rangoon)대 재학 시절 교지(Oway) 편집장과 학생회장을 지냈다. 대학 당국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퇴학 위기에 몰리자 동맹휴학으로 맞섰고, 전버마학생연합(ABSU)을 결성해 의장이 됐다. 그는 30년대 버마 학생운동의 전설적 지도자였다. 1938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버마 독립ㆍ민족주의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39년 버마 공산당을 설립, 총서기를 맡는 등 청년 시절의 그는 공산주의자였으나 바탕은 민족주의자였다. 그에게 이념은 독립ㆍ단결의 수단이었다. 영국 총독정부에 쫓겨 중국(국민당)으로 일본으로 피신 다니며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도, 그가 이념형 리더가 아니라는 점을 방증한다. 전시 일본 괴뢰정부의 요직을 맡기도 했지만, 그들의 횡포를 경험하고 친일 출세의 길을 벗어나 다시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아웅산이 흔히 사회주의에 살짝 경도된 좌우합작의 민족주의자 여운형과 대비되는 건, 유사한 이념적 지향과 더불어, 같은 날 암살당했고 암살 배후 역시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서다. 다만 해방정국의 여운형과 달리 그는 미얀마의 독보적 리더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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