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집회 적발 사건 후
집안 감금당한 이벽 역병 걸리자
가족들이 땀 내야 한다며
이불 뒤집어 씌었는데 질식
수험생 모드로 돌아온 다산
천주학 세상 열어 준 스승의
허망한 죽음에 큰 충격
이 일 이후 전혀 다르게 변했다
다시 조신한 모범생으로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감시 아래 다시 수험생 모드로 돌아섰다. 다산은 상황 판단이 늘 빨랐다. 고집을 부려 경거망동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벽과 이승훈 등 두 주축의 발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 시기 다산은 부친과 함께 ‘주역’을 읽었다. 훗날 천주교 신앙 문제로 평생의 원수가 된 이기경(李基慶)과도 가깝게 지냈다. 용산에 있던 그의 정자로 가서 과거 준비를 위한 변려문 공부에 몰두했다. 이후 다산이 다시 성균관의 각종 시험에서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아버지 정재원의 감시도 조금 느슨해졌다.
중심부가 와해된 천주교 집회는 중단되었다. 스스로 이단 선언을 한 이승훈은 운신이 어려웠다. 이벽은 당시 온 집안이 동원된 강력한 감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산 형제에게도 부친의 보이지 않는 감시가 따라 다녔다. 모든 것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열병보다 강렬했던 신앙의 열정이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평온한 나날이 흘러갔다. 하지만 자형 이승훈의 이단 선언과, 큰형의 처남 이벽의 강제 연금으로 공백 상태에 빠진 지도부의 상황을 지켜보던 다산의 심경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미사 집회 장소를 제공했던 김범우는 참혹한 형벌 끝에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귀양을 떠나 뒤에 그곳에서 죽었다. 막 꽃봉오리가 맺히던 조선의 천주교회는 다시 눈 속에 파묻혔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산은 냉각기를 갖고 교회 재건의 기회를 살펴야 했다.
이벽 부친의 자살 소동과 정신 착란
사돈 간이기도 한 양가 부친의 적극적 노력으로 이승훈과 다산 형제 쪽은 외견상 진정이 되었다. 성정이 과격했던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李溥萬)은 ‘추조 적발’ 이후 아들이 그 수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그야말로 펄펄 뛰었다. 그는 아들에게서 천주교를 떼어내려고 갖은 설득과 위협을 거듭했다. 이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부만은 천주교로 인해 집안이 문 닫는 꼴을 볼 수 없으니, 당장 배교하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죽겠노라며 자식 앞에서 목을 매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 서슬에 이벽은 그만 주춤했다.
이벽은 키가 180㎝가 넘는 거구로 한 손으로 100근의 무게를 너끈히 들어 올리는 장사였다. 외모로 풍기는 위엄이 있어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던 미남자였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워낙 세서 누구도 그를 꺾지 못했다.
다블뤼의 비망기에는 연금 당시 이벽을 배교하게 만들려고 갖은 책략을 썼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천주교도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이벽에게 부렸다는 재간과 책략은 구체적 설명 없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계략과 거짓말을 죄다 동원했다고만 적었다. 바깥소식이 차단된 이벽에게 함께 했던 동료들의 잇단 이탈과 배교 행동을 부풀려 말한 것일 터였다. 다블뤼의 비망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러한 끊임없는 공격에 이벽은 글로는 묘사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던져졌다. 그는 기운이 없고, 말이 없고, 침울한 사람이 되었다. 낮이고 밤이고 눈물이 그칠 줄 몰랐고 시시각각으로 그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더 이상 옷을 벗지 않았으며 잠은 멀리 달아났다. 여전히 가끔 먹기는 하였지만 모든 식욕을 잃은 지라 아무 맛도 없었고 몸에 도움도 안 되었다. 이 심한 상태는 지속될 수가 없었고, 불행하게도 본능이 이겼다는 조짐이 드러났다.”
달레는 또 “이벽은 마침내 시달림에 지치고 배교자에게 속고, 실망에 빠진 아버지를 보고서 정신이 착란되어, 그 사람의 말에 넘어가게 되었다. 명백하게 배교하는 것은 주저하여, 두 가지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다”고 당시 이벽이 처한 정황을 부연했다.
초기에 이벽의 영혼은 불안과 우울에 침식당했고, 극도의 불면증에 시달리며 식음을 전폐해 착란의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후 그는 차차 평온을 되찾아 건강을 회복했다. 신앙의 열병은 겉보기에 없었던 일처럼 되었고, 심지어 그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기까지 해서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이때 이벽이 실제로 배교의 상태로 빠져든 것인지, 탈출을 위해 가족들을 방심케 하려는 의도된 행동이었는지는 이제 와서 가늠할 길이 없다.
이벽의 돌연한 죽음
이 와중에 1785년 7월초 이벽의 갑작스럽고도 비극적인 죽음이 다산에게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산이 받았을 엄청난 충격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6월말 역병이 돌았던 듯하다. 다블뤼와 달레는 페스트로 표현했지만 역사 기록에는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장티푸스나 콜레라 같은 질병이었을 것이다. 쇠진한 육신에 역질이 스며들자, 가족들은 이벽에게 땀을 내게 하려고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이불 속에서 이벽은 땀구멍이 열리지 않은 채 질식하여 그만 삶의 맥을 놓았다. 병을 앓은 지 8일만의 일이었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천주교 신앙 집단은 최고이자 거의 유일한 이론가를 잃었다.
다블뤼와 달레는 ‘조선순교자비망록’과 ‘조선천주교회사’에 당시 이벽의 상황과 심리 상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를 마치 곁에서 지켜 본 것처럼 세세하게 묘사했다. 특히 이벽에 대한 다블뤼의 너무나도 상세한 묘사는 다산이 만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조선복음전래사’란 책에 수록된 내용임에 틀림없다. 다산이 아니고는 이벽의 마지막을 이렇듯 핍진하게 묘사할 수 없다. 다블뤼도 직접 자신의 비망기 내용 중 천주교회사의 초기 부분은 정약용이 수집해 기록한 것에 전적으로 의지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블뤼의 비망기 중에서도 이벽 관련 내용의 소개는 다른 대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길고도 상세하다.
이벽의 사망 시기는 기록에 따라 얼마간의 혼선이 있다. 다블뤼와 달레는 이벽의 사망이 1786년 봄이라고 썼다. 하지만, 다산이 쓴 ‘우인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挽詞)’가 편년 순인 다산 시집에 1785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실렸고, 제 7구에 “가을 타고 홀연히 날아 떠나니(乘秋忽飛去)”라 했으니, 1785년 7월의 일이 분명하다. 족보에도 그렇게 나온다.
신서파(信西派)를 대변한 ‘조선복음전래사’
다산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논할 기회를 갖겠다. ‘조선복음전래사’란 책 제목은 다산이 지은 원래 명칭이 아니라, 다블뤼가 자신의 ‘조선순교자 비망기’에서 ‘Les notes manuscrites sur Ľ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ée’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로 다시 옮길 때 번역자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다. 다블뤼의 명칭을 직역하면 다산이 지었다는 책의 제목은 ‘조선천주교 설립에 관한 비망기’다. 나는 ‘조선복음전래사’의 원래 제목이 ‘대동서학고(大東西學攷)’거나 ‘서학동전고(西學東傳攷)’쯤이었을 것으로 본다.
다산은 강진 유배시절 해남 대둔사의 역사를 정리한 ‘대둔사지’를 엮을 때, 뒤편에 부록으로 ‘대동선교고(大東禪敎攷)’를 포함한 바 있다. 말 그대로 조선불교전래사에 해당하는 저술이다. 다산은 불교 신자로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역대 문헌에서 불교 전래와 신앙에 관한 내용을 편년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을 뿐이다.
만년의 다산은 공서파(攻西派)인 이기경이 엮은 ‘벽위편(闢衛編)’과 이재기(李在璣)의 ‘눌암기략(訥菴記略)’ 등 척사의 시각에서 기술된 책자의 논리에 맞서 천주학이 전래 도입되던 초기의 상황과 중심인물들의 행적에 대해 객관적으로 기록해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신서파(信西派)를 대변해 이른바 ‘조선복음전래사’를 집필하고, 주변의 일화들은 ‘균암만필’ 등의 기록으로 남겨, 저들의 공세에 대응코자 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178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이벽의 죽음으로 초기 천주교 신앙집단은 배를 이끌 선장을 잃었다. 다산은 이벽에 대해 말할 때면 늘 우인(友人) 즉 벗이라고 했지만, 다산에게 이벽은 벗보다는 스승에 더 가까웠다. 그에게 이벽은 학문적 사유의 힘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천주학의 황홀한 은하계를 활짝 열어 보여주었던 스승이었다.
그랬던 그를 적발 사건 이후 얼굴 한 번 못 본 채 지내다가 석 달 만에 참혹한 부고를 들었다. 이벽의 죽음은 다산의 젊은 시절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다산의 청년시절은 한 매듭이 지어졌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강진 시절에, 다산은 이벽과 젊은 시절 함께 작성했던 ‘중용강의’를 새로 정리해 ‘중용강의보’로 마무리 한 뒤, 서문에 이렇게 썼다. “위로 이벽과 토론하던 해를 헤아려보니 어느새 30년이 되었다. 그가 여태 살아 있었다면 덕에 나아가고 학문에 해박함을 어찌 나와 견주겠는가? 옛 글과 지금 글을 합쳐서 본다면 틀림없이 놀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살아남았고 한 사람은 죽었으니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랴.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한다.” 1814년 7월 말에 썼다. 그 행간에 고인 회한이 맥맥하게 느껴진다.
1785년의 잔인한 여름은 이렇게 지나갔다. 다산의 연보나 시문집만 봐서는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던 아주 평온한 여름이었다. 연보 속의 그는 임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성균관의 주목 받는 수험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 다산은 전혀 다르게 변했다. 속 깊은 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 앉아 있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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