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대담서 지적
기업 투자 급감… 성장률 반토막
투기자본 폐해 막을 제도 필요
장기주주 우대 가중의결권 제안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반토막 난 이유는 단기이익에 급급해진 기업들의 설비투자 급감 때문이다.”
‘사다리 걷어차기’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이자 세계적 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10일 한국 경제에 경고장을 날렸다. 그는 “한국 경제가 선진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큰 전환점에 서 있다”며 기업의 투자를 되살릴 가중의결권(장기 주주에게 의결권을 더 주는 제도) 도입 등을 권고했다.
진보와 보수의 시각을 넘나들며 날카로운 분석을 제시해 온 그는 현 정부의 대기업 지배구조 흔들기를 비판하면서도 국민연금의 주주역할론과 노동자의 이사회 참여 등은 옹호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평가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평가를 보류했다.
장 교수는 이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주최한 ‘기업과 혁신 생태계’ 특별대담에 참가해 이같이 지적했다.
그는 우선 “우리 경제가 심각한 저성장을 겪고 있다”고 우려했다. “과거 고도 성장기 6%를 넘던 성장률(1인당 국민소득 기준)이 외환위기 이후 2∼3%대로 떨어졌는데, 이는 외환위기 이전 14∼16% 수준이던 국민소득 대비 설비투자 비율이 7∼8%로 반토막 났기 때문”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장 교수는 또 “선진국이 이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제약, 기계, 부품, 소재 산업 등에서 우리 기업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반도체 생산은 세계 1위지만 그 반도체를 만드는 기계는 여전히 일본, 독일에서 수입하고 있다”며 “반도체 역시 중국이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어 한국의 우위가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 같은 이유를 외환위기 이후 대거 유입된 외국자본에서 찾았다. 특히 단기이익을 추구하는 외국인 주주들 입김이 강해져 고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을 요구하면서 대기업의 장기투자가 위축됐다는 것이다. 그는 “역대 정부가 혁신 생태계를 아무리 조성해도 음식(설비투자)이 공급이 돼야 생물(기업)들이 먹고 자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최근 인위적으로 기업 지배구조를 와해시켜려는 시도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으로, 자칫 엘리엇 같은 외국 자본에게 기업을 넘겨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경계했다.
장 교수는 이런 투기자본의 폐해를 막기 위한 제도로 가중의결권 도입을 제안했다. 1년 이하 보유주식 1주에는 1표, 2년 보유는 2표, 3년 이하 보유는 5표, 5년 이하 보유는 10표 식으로 장기 보유 주주들에게 의결권을 더 많이 줘 장기투자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만 “재계가 요구하는 포이즌필(Poison Pill), 황금주 등은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방어 장치가 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또 “장기투자 촉진 차원에서 공공성을 가진 투자자인 국민연금의 기업경영 개입, 기업 이사회 내 노동자ㆍ지역사회 대표 등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장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기업ㆍ산업 정책을 채점해 달라는 요청에 “(어려운 상황에) 막 공부를 시작한 학생을 평가하란 뜻이어서 다음 학기에야 학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 자체는 옳다고 보지만, 액수나 적용 분야를 달리해야 하는지는 더 논의해야 할 것”이라며 “대타협으로 적정한 길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자리를 함께 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도 주주자본주의의 단기이익 추구성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 기업의 약진에는 단기이익 추구에 흔들리지 않는 인내자본, 즉 사내유보금의 역할이 컸다”며 “초과이윤을 죄악시하는 분위기에서는 기업가정신이 일어날 수 없기에 혁신이 일어날 환경을 잘 만들고 그 결과물의 적절한 분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