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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80년 전 반난민 정서가 안네의 희망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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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80년 전 반난민 정서가 안네의 희망 꺾었다”

입력
2018.07.09 17:07
수정
2018.07.09 19:4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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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ㆍ美 공동 보고서

“두 차례 이민 추진했지만 좌절”

1971년 영국 런던에서 안네 프랑크(사진 속 소녀)의 부친인 오토 프랑크가 ‘안네의 일기’ 100만권 판매를 기념한 골든팬 상(Golden Pan award) 트로피를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1년 영국 런던에서 안네 프랑크(사진 속 소녀)의 부친인 오토 프랑크가 ‘안네의 일기’ 100만권 판매를 기념한 골든팬 상(Golden Pan award) 트로피를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안네의 일기’ 주인공인 안네 프랑크의 가족이 독일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 이민을 두 차례 추진했으나 미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장벽’ 탓에 결국 좌절을 겪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안네가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15세의 꽃다운 나이에 희생된 ‘비극’의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 미국 사회에 팽배했던 반(反)난민 정서, 미국 행정부의 관료주의 등이 작용했었던 셈이다.

8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 ‘안네 프랑크 하우스’와 미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공동 발간했다. 안네 일가의 망명 신청을 미국이 명시적으로 거부하진 않았지만, 나치 점령 시절 미국으로 도피하려던 유럽 내 유대인들은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했었다는 게 보고서의 골자다.

안네의 부친인 오토 프랑크는 2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38년 초, 네덜란드 로테르담 미국 영사관에 이민 신청 서류를 냈다. 당시 미국은 구체적인 난민 정책을 두지 않고, 국가별 할당량만 정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1940년 독일군 공습으로 영사관이 파괴되면서 이민 신청서 자체가 사라졌다. 이후 유대인이 사실상 무국적자로 취급되면서 안네 가족은 관련 서류 준비에도 힘겨움을 겪게 됐다.

바로 그 시기, 미국에선 난민에 대한 부정적 기류가 확산됐다. 1938년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67%는 “독일ㆍ오스트리아 등에서 정치적 난민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답했다. 1941년에는 71%가 “미국에서 나치가 스파이와 파괴 공작원 네트워크를 구축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그로 인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독일 점령국에 거주하는 미국인 친척들의 이민 신청마저 거부하기도 했다. 보고서는 “국가 안보가 인도주의적 우려보다 우선시된 것”이라고 적었다.

이런 가운데 오토 프랑크는 1941년 친분이 있는 미국인 사업가를 통해 두 번째 ‘탈출 시도’에 나섰다. 그는 그해 4월 편지에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다. 미국만이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썼다. 그러나 두 달 뒤, 미국과 독일이 서로의 영사관을 폐쇄하면서 안네 가족의 ‘미국행 꿈’은 물거품이 됐다.

보고서는 “(전쟁 상황에서) 이민 신청자가 급증하는데도 미국 국무부와 의회는 1924년 제정된 이민 할당법의 한도 이상으로 난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며 “관료주의와 전쟁, 시간 탓에 안네 가족의 이민 신청서는 무용지물이 됐다”고 결론 내렸다. 1942년 은신 생활에 들어간 안네 가족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944년 8월 나치에 발각됐고,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수용소에서 숨졌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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