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대선이 끝났다.” 지난 6ㆍ13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누군가가 이렇게 평했다. 한반도 정세의 근본적인 전환 속에서 집권 여당이 압승하고 보수야당이 참패한 의미를 온전히 다 담아낼 수는 없어도, 작년 대선 이후 한국의 여의도 정치를 압축적으로 요약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한 논평이 없어 보인다. 일차적인 당사자 중 한 명인 안철수 전 서울시장 후보에게 전례 없이 정계은퇴를 권하는 목소리가 많아진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듯하다. 안철수에게는 야박하게 들리겠지만 내 생각엔 단지 대선만 끝난 게 아니라 이른바 ‘안철수 현상’도 완전히 소멸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처음에는 ‘안철수 현상’에 큰 기대를 걸었다. 허구적이고 소모적인 한국형 보수·진보의 대립구도를 끝내고 87년 체제를 극복해 새 시대를 열어젖힐 돌파구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어쨌든 안철수는 한국사회에서 사악해지지 않고서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때까지 한국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두 인물이 있다. “도덕성보다 능력”이라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의 있습니다.” 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압축 성장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자는 산업화 세력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민주화 세력의 대립은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현 대통령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이해하는 안철수 현상의 본질은 이제 더 이상 보수·진보의 낡은 대립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한국사회가 복잡해지고 성숙했으니 새로운 가치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요구였다. 안철수는 이 요구에 부응할 그럴 듯한 인물로 주목받았다.
내가 안철수에 기대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이공계 출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의 시대적인 요구는 문명화라고 생각한다. 문명화의 핵심은 자신과 주변에 대한 주체적인 통찰과 자기완결성이다. 이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 주역은 과학이다. 어쨌든 21세기는 과학문명의 세기일 것이다. 지금은 하루가 멀다 하고 4차 산업혁명이 입에 오르내린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리더십의 항목 중에 이제는 이공계적인 마인드가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평가 받아야 한다. 87년 체제는 기본적으로 인문학적인 담론이 지배적인 체제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이공계 담론이 균형을 맞춰야 낡은 체제를 온전히 극복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인문계와 이공계의 벽을 뛰어넘는 일종의 융합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안철수는 이 요구를 제대로 받아 안지 못했다. 그가 말했던 새 정치는 한 번도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안철수 현상의 유일한 효용성은 지난 2012년 초반 이른바 ‘박근혜 대세론’에 균열을 낸 것뿐이다.
안철수는 왜 실패했을까? 이공계 출신의 장점을 살리기보다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쉬운 단점에 갇힌 것도 한 원인인 듯하다. 자동차를 잘 만드는 것과 운전을 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특정 전문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중에 다른 분야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다. 한국 정치가 아무리 후진적이라 해도 정치 또한 고도의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영역이다. 정치에 뛰어든 안철수는 자신의 새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겸손한 자세로 한국의 정치를 열심히 공부했어야 했다. 그래야 새로운 융합이 가능하다. 정치인 안철수의 직전 직함이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지난 대선 기간 안철수는 자신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할 최적임자라고 주장했지만, 4차 산업혁명의 핵심가치 중 하나인 수평적·분권적 네트워크의 가치를 정치현실에서 스스로 구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안철수와 대비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유시민이다. 유시민이야말로 87년 체제의 화신이라 할 만하다. 정치와 경제 분야의 민주화 담론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도 크게 기여했다. 최근 유시민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몇 달 전 어느 방송사에서 있었던 비트코인 관련 토론회에서였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최신의 과학기술 결과물에 대해 해당분야 전문가와 의미 있는 토론을 할 정도로 준비가 잘 돼 있었고 나름 자신의 내용으로 체화한 듯 보였다. 나는 비트코인을 대하는 유시민의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놀라운 학습능력과 도전정신은 유시민이 왜 이 시대 최고의 논객인지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정작 본인은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로 말문을 열었으나 실상 죄송함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87년 체제가 유시민을 길러내는 동안 우리는 왜 ‘이공계의 유시민’을 키우지 못했을까? 과학기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감동과 행복을 주는 정치 지도자를 왜 아직 찾기 어려울까? 세인들이 과학기술을 잘 모르고 홀대한다고 불평하면서도 우리 이공계는 과연 얼마나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까? 안철수의 몰락을 지켜보며 “이과라서 죄송”했던 순간들이 자꾸 떠오른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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