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성향 오브라도르 대선 압승
중도 우파 집권층 부패에 불만 폭발
미국과 관계 더욱 악화할 가능성도
중남미의 대표적인 우파 장기 집권 국가인 멕시코에서 무려 89년 만에 좌파 정권이 탄생한다. 1일(현지시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민족주의 성향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64) 후보가 과반수의 표를 획득, 압승을 거둔 것이다.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암로(AMLO)’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멕시코 우선주의’를 외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비판해 왔던 터라, 무역ㆍ이민 문제로 갈등에 빠진 미ㆍ멕시코 관계가 더욱 악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외신에 따르면 멕시코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날 밤 예비개표 결과를 통해 중도 좌파 정당으로 구성된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선거연대의 암로 후보가 53~53.8%를 득표해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밝혔다. 해당 선거연대에는 암로가 속한 모레나(MORENAㆍ국가재건운동)와 노동자당(PT), 사회모임(PES) 등이 참여했다. 암로는 승리 연설에서 “부자와 빈자, 종교인과 비(非)종교인, 이민자 등 모든 시민들을 대변하고 존중할 것”이라며 “국민 통합을 이루고, 부정부패 척결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겠다”고 밝혔다. 좌파 연대는 총선, 지방선거도 함께 실시돼 역대 최대 규모였던 이번 선거에서 멕시코시티 시장을 비롯, 최소 5곳의 주요 광역자치단체장도 배출할 것으로 예상됐다.
2006년과 2012년 민주혁명당(PRD) 후보로 출마했다 고배를 마신 암로가 대선 3수(修) 끝에 결국 대권을 거머쥐게 된 최대 요인은 제도혁명당(PRIㆍ1929~2000년, 2012~2018년)과 국민행동당(PANㆍ2000~2012년) 등 중도 우파 집권 89년간 쌓인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탓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중도주의적 비전과 세계화를 받아들인 국가의 현 상태에 대한 멕시코인들의 명백한 거부”라며 “좌파 세력에게 정치 개혁과 국가 재건의 임무가 주어졌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암로가 ‘권력 마피아’라고 부른 기성 정치인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이라고 보도했다. ‘변화에 대한 갈망’이 컸다는 무엇보다 컸다는 얘기다.
멕시코 내 ‘반(反)트럼프’ 정서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이번 대선에서 거의 모든 후보들이 미국의 국경 장벽 건설, 이민 정책 등을 비판했지만, ‘멕시코의 좌파 트럼프’로 불리는 암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트럼프와 대립각을 세웠다. NYT는 “암로 열풍의 핵심 요인은 멕시코 국내 이슈의 결과라 해도, 이제 새 대통령은 미국 정부에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WP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멕시코 대선 결과를 낳은 결정적 변수는 아니지만, 그 뒤편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
다만 12월1일 공식 출범을 앞둔 암로 정권의 미래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멕시코시티경제연구센터 연구원인 카를로스 브라보는 가디언에 “암로의 선거 승리 이면에는 공산주의자부터 극보수주의자들까지, 모든 세력의 합종연횡이 있다”며 “암로 정권의 향후 행보를 예측하는 건 헛고생이며, 내부 다툼에 따라 정책 결정의 우선 순위가 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정부패 해소, 마약ㆍ폭력 근절, 일자리 창출, 인프라 투자 확대 등 해결해야 할 현안도 산적해 있다.
특히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도 새로운 정권을 시험대에 올려 놓을 전망이다. 트럼프를 비판하면서도 암로는 보수층을 잡기 위해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를 약속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암로의 당선을 축하한 뒤 “나는 그와 함께 일하기를 무척이나 고대한다"고 말했다. 워싱턴 우드로윌슨센터의 에릭 올슨 연구원은 미ㆍ멕시코의 긴장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그러나 미국과 멕시코가 등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양국의 대통령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함께 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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